국방동우회 24년 마무리 행사로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있는 아산 현충사 방문과 도고온천을 추진하였다.
【현충사顯忠祠 】 사적 제155호
임진왜란 때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순국한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1704년(숙종 30) 아산의 지방 유생들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사당건립을 상소함에 따라 1706년에 건립했으며, 그 이듬해 '현충사'로 사액되었다. 1865년(고종 2)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후 황폐화되었다가, 1932년 6월 이충무공유적보존회와 동아일보사가 성금을 모아 중건하여 영정을 봉안했다. 1962년 3월 1일 충청남도에서 경내를 확장하고, 유물전시관을 신축했다. 1967년 3월 18일 현충사를 사적 제155호로 지정했고, 이때 보호구역의 면적은 10만 6,577평이었다. 그 후 1973년 5월 현충사 사적보호구역을 21만 6,137평으로 확장·지정했으며, 1974년 4월 42만 4,880평으로 다시 확장했다.
경역 면적은 16만 3096평이고, 주요 시설로 본전(本殿) · 구본전(舊本殿) · 유물관 · 고택(古宅) · 활터 · 홍살문(紅―門) · 정려(旌閭), 이면(李葂)의 묘소 등이 있다. 본전은 이순신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지금의 영정은 1953년 장우성(張遇聖)이 그린 것으로,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다. 구본전은 본전을 신축할 때 배전(拜殿)으로 이용하기로 하고 사적비(事蹟碑)와 함께 유물관 옆으로 이전하였다. 고택은 이순신이 자라난 집으로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왔으며, 몇 차례 중수 또는 개수되었다. 활터는 옛집 옆에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 곳으로 이순신이 활을 쏘며 무예를 닦던 곳이다. 홍살문은 사당 경내를 표시하는 정문으로 1932년 중건 때의 자리에 있다.
정려에는 이순신과 조카 이완(李莞), 4대손 이홍무(李弘茂), 5대손 이봉상(李鳳祥), 효자 이제빈(李悌彬) 등 5인의 편액(扁額)을 보존하고 있다. 이면은 이순신의 셋째아들인데 임진왜란 때 21세로 이곳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가 왜군을 막기 위해 싸우다 전사하였다. 또한 고택은 이순신이 성장한 집이며, 활터는 이순신이 활을 쏘며 무예를 익힌 곳이다. 유물관에는 국보 제76호로 정해져 있는 〈난중일기 亂中日記〉·〈서간첩 書簡帖〉·〈임진장초 壬辰狀草〉, 보물 제326호로 지정된 장검(長劒)·옥로·요대·도배구대(桃盃俱臺)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유물관에 전시된 것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경상남도 통영시의 충렬사(忠烈祠)에 전시되어 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파라다이스 스파 도고는 충남 보양온천 1호라고 하네요..
도고 온천장 카라반과 야외족욕장(아래)..
온천을 한 후 아산 신정화 한식당 고구려에서 식사를 하였다.
(강항 밥 & 4인 기준으로 불고기, 고등어, 제육, 홍어무침, 우렁쌈장 등의 반찬이 깔끔합니다)
식사 후 아산 현충원을 방문하였습니다..
활터, 정려, 충무문,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유물관에는 국보 제76호로 정해져 있는 〈난중일기 亂中日記〉·〈서간첩 書簡帖〉·〈임진장초 壬辰狀草〉, 보물 제326호로 지정된 장검(長劒)·옥로·요대·도배구대(桃盃俱臺)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유물관에 전시된 것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경상남도 통영시의 충렬사(忠烈祠)에 전시되어 있다.
충무문..
현충사에는 멋진 소나무 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려로 이곳에는 이순신과 이완(李莞)·이홍무(李弘茂)·이봉상(李鳳祥)·이제빈(李悌彬) 등 5명의 편액이 있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감이 달려 있고..
사당 경내를 표시하는 홍살문..
충의문..
현충사..
현충사 주변은 대나무로 되어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영정..
【23전 23승의 연승신화 이순신】
이순신이 임진년의 첫 전투인 옥포 해전부터 계유년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까지 거둔 23전 23승의 연승 행진은 멸망 일보직전의 조선을 지탱해준 궁극의 버팀목이었다.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손꼽히는 한산도대첩 역시 이런 절박감과 이순신의 철두철미한 용병술이 빚어낸 당연한 승리였다.
우리는 난중일기를 통해 성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만날 수 있다. 일례로 그는 전장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도원수 권율의 그릇된 일처리를 비난하고, 경상 좌병사 김응서의 잘못된 정세판단을 강하게 비판한다. 또 수시로 자신을 모함하는 전라수사 원균이 음험하고 흉악하다고 표현하는 등 불쾌한 내심을 숨기지 않는다. 절망적인 첫 백의종군과 함께 다가왔던 홀어머니의 부음, 사랑하는 아들 이면의 비보를 접하고는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토로한다. 그처럼 이순신은 장수로서 어버이로서 수시로 닥쳐오는 불행과 고통을 홀로 오롯이 감내해야 했던 한 명의 고독한 인간이기도 했다. 이런 불세출의 승장 이순신에게 당도한 것은 ‘통곡(痛哭)’이란 두 글자가 쓰인 편지였다. 그해 10월 사랑하는 셋째아들 이면이 고향을 급습한 왜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출처 : 한국사 인물열전에서 발췌)
묵념을 올립니다..
현충사에서 본 모습..
현충사를 둘러본 후 예집과 활터로 이동합니다..
모과나무에 모과가 많이 달려 있습니다..
목련에 꽃망울이 맺혀 있듯이 비록 지금은 차가운 현실이지만 봄은 올 것입니다..
옛집(고택)은 이순신 장군이 성장한 집이다..
활터로 옛집 옆에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 곳..
후손 묘..
이순신이 활을 쏘며 무예를 익힌 활터..
멋진 풍경입니다..
정유재란 당시 13척으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명량(鳴梁) 해전 전야 마음의 각오를 다졌던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어록의 친필..
【명량(鳴梁) 해전】
조선 수군 판옥선 13척과 일본군 함대 133척(당시 일본 전선 수는 330여 척, 직접 참전한 전선이 133척)이 맞붙어서 조선 수군이 10배가 넘는 일본군을 궤멸시키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대첩이다.일본군은 이 대첩에서 크게 패배하여 전선 중 최소 31척이 침몰되거나 불에 탔다. 이 31척은 이순신이 직접 세어 난중일기에 기록한 것으로, 후퇴는 했으나 파손된 선박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후퇴했고, 이후 정유재란 내내 육군에게 해상로를 통해 물자를 보급하여 정비한 후 한양을 점령하고 삼남을 정벌하겠다는 기존 전략이 완전히 무산되었다. 명량 해전은 단순하게 소수의 전선으로 적의 대함대를 막아낸 전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모든 전투 중 조선의 존망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격전으로서 단 한 번의 승전으로 조선의 패망을 막아내고 일본의 작전을 기초단계부터 꼬이게 만들어 버린 커다란 승전이였다.
이순신은 당시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인 상태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명량 해전의 승리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일궈낸 기적 같은 것이었으며, 패배한 일본군에게는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미온적이고 오만했던 명나라 군에게는 조선의 긍지를 널리 떨친 그 무엇보다도 값진 대첩인 것이다. 레딧( 미국의 초대형 소셜 뉴스 웹사이트)에서 전 세계의 역덕(역사 애호가, 역덕후)들에 의해 이순신이 세계에서 제일 위대한 군지휘관 순위 해군 부문 1위에 랭크되었는데, 여기서는 한산도 대첩 대신 명량 해전을 이순신의 가장 위대한 승전으로 랭크하였다. 대첩의 사전적 정의와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승전의 가치로 따지면 3대 대첩 이상인 대승이었던 것이다.(출처 : 나무 위키에서 발췌)
이것으로 금년 국방동우회의 공식행사를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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