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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동남아여행(캄보디아)

뚜어슬랭대학살 추모박물관 탐방(19.12. 1) 동남아여행 7일차

by 산사랑 1 2020.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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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여행 7일차 12.1(일) :

 

두 번째 투어는 캄보디아의 슬픈 역사를 볼 수 있는 뚜어슬랭대학살 추모박물관 탐방

 

이곳은 뚜어슬랭대학살 추모박물관으로 입장료는 오디오 포함 8달러였다. 1975~79년까지 발생했던 악몽같은 현장으로 체포되었다는 사실이 유일한 유죄의 증거였다. 이곳 S21에 끌려온 자는 대략 17,000~21,000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뚜어슬랭대학살 추모박물관 입구.. 

 

 

【뚜어슬랭대학살 추모박물관】

 

캄보디아 공산당무장단체인 크메르 루주는 1975년에서 1979년까지, 1만 6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뚜얼슬랭에 가둔 후 고문과 학살을 감행했다. 뚜얼 슬랭 감옥은 각종 심문기록과 수감자의 사진을 비롯한 증거들이 잘 보존돼 있고, 그 기록 및 재판 과정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문헌자료들이 남아 있다.

 

 

뚜얼슬랭 박물관은 몇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처음 발견되었을 당시 모습 그대로 보전하고 있다. 원래 철조망은 없었으나 고문에 시달리다 못해 3층에서 뛰어내린 사건이 발생한 후 철조망을 쳤다고 한다. 맘대로 죽지도 못하게 심지어 고문을 받다 죽어가면 의사를 불러 치료까지 해주었다는데 죄수들은 상부의 사형집행 명령이 떨어져야만 죽을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뚜옹 슬렝 감옥에는 크메르루주 조직원이었으나 내부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거나 스파이로 몰려 끌려온 이들이 많았다. 이 감옥에 끌려운 1만 6000여 명 중 겨우 10여명 만이 살아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잔인한 고문, 구타, 학대 끝에 자백한 이들은 쯔응아익으로 끌려가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이들은 총알을 아낀다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얼굴을 비닐백으로 덮어 질식시켰다. 심지어 엄마를 따라온 갓난아이들도 죽였다. 특히 크메르루주 정권은 이러한 학살범죄에 10대 중반의 소년소녀들을 앞세웠는데 뚜올슬렝 감옥에서 교도관으로 일하던 자들의 80%가 21세 미만의 청소년들이었다.

 

이곳에 수감된 수감자들은 16세의 사진사 넴 예인에게 사진을 찍어야했고, 이 사진들은 고문을 통해 확보한 진술서와 함께 기록실에 보관되었다. 1979년 베트남군에 의해 발견된 이 사진들은 무려 1만 6천여장에 달했다. 크메르 루주는 그들의 집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록을 남겼으나 오히려 그들의 잔인함을 증명해주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뚜얼슬랭 박물관은 평면도..

 

입장료를 지불하고 첫 번째 마주친 현장은 묘지로서 이곳은 마지막 희생자 14인의 묘지라고 한다. 크메르 루주가 도주하면서 마지막으로 죽였던 자들로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이곳에 매장을 하였다고 한다.

 

최후의 14인 묘지..

 

지금은 지극히 평화로운 장소 같은데 이곳에서 끔직한 죽음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이 지역 거주자 모두는 시골로 이주 당했으며, 이곳은 여자고등학교였는데 감옥으로 개조를 하였으며 이곳에서 살아나간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할 정도로 잔인하게 고문을 한 현장이다. 창문은 모두 쇠창살로 가려져 있고 이곳에서 몇 주, 심지어는 몃 달 동안 고문을 당했다. 한번 들어오면 절대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곳으로 이곳에 끌려온 자 중에는 12,000명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곳에 끌려 온 자들은 처음에는 당시 지배자였던 론놀 장군의 지지자들이었고 그후 승려, 의사. 변호사, 학생, 교사 등 지식인들과 심지어는 교도관 150여명, 어린이 89명 등도 끌려왔다고 한다.

 

어린아이까지 죽음을 당했던 곳이다..

 

문을 했던 장소와 고문기구 들입니다..

 

틀은 모두 철조망 등으로 막아 놨네요..

 

이곳은 당초 여자고등학교였는데 현재 이곳 지명은 당시 초등학교 이름을 따서 뚜어슬랭 대학살 추모박물관이라고 한다. 운동장에 있는 교수대는 형 집행이 아닌 고문을 하던 장소였다. 이곳에서 밧줄을 목에 걸고 고문을 하였으며 기절을 하면 항아리에 담겨 있는 구역질나는 물을 끼얹고 다시 고문을 했다고 한다.

교운동장으로 고문을 하던 장소라고 합니다..

 

16세의 사진사 넴 예인이 이곳의 사진을 기록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기록관은 B동2층에 있는데 사전 신청된 사람들만 볼 수 있어 통과하였다. C동은 발견당시 상태를 최대한 유지했고 2~3층의 철조망은 수감자가 자살함에 따라 자살을 방지하기 위하여 설치했다. 어린 감시인들이 트럭을 타고 온 수감자들의 목에 밧줄을 걸고 끌고 갔고 한 평도 안되는 조그만 감방에 수감되었다. 감방에 오면 짧은 바지를 제외하고 모두 벗기고 머리에 천을 씌우고 목에 쇠줄을 걸고 맨바닥에서 생활하면서 고문을 당했다.

철조망은 수감자가 자살함에 따라 자살을 방지하기 위하여 설치했다고 하네요..

 

교실에 벽돌을 쌓아 수용시설로 개조한 것입니다..

 

수감자들은 겨우 사람 한명이 누울 수 있는 공간에서 목에 밧줄을 걸고 살아야 했다..

 

도시거주자들은 모두 시골로 강제 이주 당했다고 합니다..

 

크메르 루주는 그들의 집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록을 남겼으나 오히려 그들의 잔인함을 증명해주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다.

 

D동 감방의 아이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여자는 크메르 루즈 군사령관의 아내였다고 하며, 보파나(?)라는 여성은 사랑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천주교 성당도 모두 파괴되고 소수민족인 짬족은 더 심한 고통을 당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다른 민족인 유대인들을 학살했지만 크메르루즈는 동족을 학살한 어찌 보면 더 악랄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념전쟁의 끝은 자기 이념 이외의 다른 이념의 존재자체를 말살 하려는 것으로 정말 잔인한 것 같다.

 

 

 

고문도구들 입니다..

 

골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런 멋진 곳이 사람을 학살한 곳이라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전 투어를 마친 후 점심식사는 컵라면에 망고 등 과일로 하기로 하였다. 컵라면 3개와 물 큰병 한통(4.6불), 망고 2kg(3불) 잭푸르트(3불) 구매하여 먹었는데 망고는 너무 많아 반밖에 먹지 못했다. 식사 후 휴식을 취한 후 저녁에 다시 리버사이드로 가서 구경을 하고 현지식(10.5불)으로 식사를 하고 나가월드 카지노를 구경하기 위하여 이동 중에 캄보디아 왕궁에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몰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오늘 오후에 왕궁을 구경하려고 했으나 사진도 찍을 수 없고 날씨도 너무 더워 포기를 하였는데 외관을 밤에 볼 수 있어 정말 좋았다. 왕궁을 구경한 후 나가월드 호텔로 이동하여 무료 공연을 잠시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와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저녁은 리버사이드로 식사를 하러 갑니다..

 

리버사이드의 모습..

 

어둠이 내려 앉고 있는  리버사이드..

 

 

 

보디아 궁으로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광장쪽으로 많이 나와 있네요..


프놈펜이 수도가 되면서 노로돔 왕이 1866년 지은 궁전이 프놈펜 왕궁이다. 프놈펜 왕궁은 크메르 루즈 집권 시에도 캄보디아 문화의 우수성을 자랑하기 위해 파괴하지 않았을 정도로 중시한 문화유산이다.  프놈펜 왕궁에는 캄보디아 현대사의 중심인물이었던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의 아들인 노로돔 시하모니 현재 국왕이 기거하고 있다.

 

 

 

 

가월드호텔에서 무료공연을 보고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