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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동남아여행(캄보디아)

프놈펜 이동 및 킬링필드현장인 쯔응아익(청아익) 대량 학살센타 탐방(19.11.30 ~12.1)

by 산사랑 1 2020.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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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

 

'죽음의 들판'을 뜻하는 킬링필드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좁은 의미의 '킬링필드'는 1975년 4월 17일 집권한 폴 포트의 크메르루즈 정권이 캄보디아를 지배한 3년 8개월 10일 동안 학살, 기아 등으로 캄보디아인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이에 더해 1969~1973년 미군이 베트남군의 보급로를 끊는다며 캄보디아 북부에 폭탄을 대량 투하해 60~80만명이 사망한 사건을 '1차 킬링필드'로 포함시키기도 한다. 또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즈 정권이 저지른 학살로 죽은 시체들을 한꺼번에 묻은 집단 매장지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약 1만 7000명의 시신을 매장한 수도 프놈펜 인근의 쯔응아익(Cheung Ek)을 비롯해 캄보디아 전국에서 2만 여개의 집단 매장지가 발견됐다.

 

대표적인 집단 매장지 중 하나인 쯔응아익(청아익) 대량 학살센터에는 17층 높이로 쌓아올린 유골이 보관되어 있는 위령탑이 있다. 뚜올 슬랭 감옥은 고문박물관으로 전시 중으로 수많은 아이들을 포함한 희생자를 찍은 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출처 : Daum백과]

 

쯔응아익(청아익) 대량 학살센터 위령탑에 있는 유골들..

 

6일차 11.30(토) : 캄보디아 씨엠립 ~ 프놈펜(Phnom Penh) 이동

 

아침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벤을 타고 5분 거리에 있는 버스 정류소로 이동하고 09:25분 버스 정류소에서 프놈펜으로 출발하였다. 씨엠립에서 프놈펜까지 거리는 약 317km로 버스로 6시간을 가야 된다고 하며 버스요금은 1인당 10불이라고 한다. 도로는 2차선 일반도로로 많은 곳에서 손님을 태우고 쉬어갔으며, 차는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숙소에 탁밧하는 스님이 오니 숙소에서 주인이 나와 맨발로 탁밧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차안에는 어린아이들이 울어재끼고 기사와 조수는 쉬지도 않고 떠들며 갔기에 최악의 환경 속에서 이동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열악한 환경이지만 이것 또한 여행이 한 단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가의 모습으로 오토바이와 툭툭이가 보이네요..

 

야시장 같고..

 

약1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295km가 남았으니 1시간 동안 22km밖에 가지 못했다. 도로가에는 가게들이 군데군데 있었고 우리나라 중학교 같은데 수업을 마쳤는지 수많은 학생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길게 줄을 지어 나오고 있었다. 아마 등⦁하교를 위한 대중교통이 없어서 학생들이 개개인별로 오토바이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 것 같았다.

 

학생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하교를 하는 모습..

 

한참 졸다보니 강을 건너고 있었다. 출발한 지 어느덧 2시간 50분이 지났고 잠시 후 주유소 겸 가게가 나와 약 15분간 휴식을 취했다. 가게에는 현지식의 음식을 팔고 있었고 과자와 음료수 등을 팔고 있었으나 간단히 요기를 할 것은 딱히 없었다.

주유소 겸 가게..

 

13:05분 프놈펜까지는 159km가 남았으며, 이도로가 국가고속도로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지방도로보다 못한 것 같다. 2차선 도로에 유조선, 뚝뚝이, 트럭, 트렉타, 오토바이 등 각가지 차량들이 달리다보니 일부 구간은 정체가 되어 차선 변경을 자주하게 된다. 출발한지 약4시간 경과 차량에 문제가 발생하여 멈추었으나 다행히 큰 문제가 아닌 지 5분후에 출발할 수 있었다.

도로가의 모습..

 

차에 문제가 발생하여 조수가 고치는 모습..

 

약 4시간50분 경과하여 10분간 휴식하면서 핫바 같은 것을 사먹고 다시 출발하였다. 아직 프놈펜까지 남은 거리는 약 105km였다. 프놈펜에는 약6시간30분이 지나 도착하였는데 교통이 정말 엉망이었다. 뚝뚝이 가격도 씨엠립에 비해 상당히 비싸게 불렀으며, 가격흥정을 해서 깍을 필요가 있다.

중앙시장 인근에 있는 호텔 아시아나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식사를 하기 위하여 일단 중앙시장으로 갔다. 중앙시장은 로컬시장으로 야채, 과일 등과 음식을 팔고 있었는데 냄새가 조금 나서 다시 뚝뚝이를 타고 1.2km 떨어진 riverside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뚝뚝이 가격은 처음 3불을 불러 흥정을 하니 1.5불로 조정할 수 있었다. 리버사이드는 똔레삽호수가 흐르고 배들이 다니고 있어 야경이 괜찮았으나 전력사정이 나빠서 그런지 도시 전체가 조금 어두운 것이 흠이었다. 캄보디아는 자체 전력이 약해 씨엠림 지역은 태국에서, 프놈펜 지역은 베트남에서 전력을 사서 쓴다고 한다.

 

리버사이드의 모습..

 

유람선이 다니는데 유람선을 타고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강변을 따라 걷고 있는데 한 여자가 말을 걸어와 잠시 얘기를 하고 야간시장으로 이동을 하였다. 마침 야간시장에는 일본 축제가 열리고 있어 잠시 둘러보고 인근에 있는 현지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였다. 인상적인 것은 도미 프라이드를 약 8달러 받고 있었는데 맛이 좋았다. 식사를 하고 다시 강변을 걷는데 조금 전에 보았던 여인을 다시 볼 수 있었는데 알고 보니 하룻밤 잘 것을 유혹하는 꽃뱀이었다. 여인에게서 벗어나 숙소로 가기 위하여 다시 뚝뚝이를 타려고 하니 역시 3불을 달라고 하여 1.5불로 흥정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내일은 킬링필드 현장 투어를 하기로 하였다.

 

일본 축제가 열리고 있더군요..

 

동남아 여행 7일차 12.1(일) : 프놈펜(Phnom Penh) 탐방

 

 - 캄보디아의 슬픈 역사를 볼 수 있는 뚜얼 슬렝 박물관 (Toul Sleng Museum)킬링필드(Killing fields) 유령탑 

 

오늘은 킬링필드현장 방문을 할 계획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09시경 호텔에 도착한 벤(6달러)을 타고 킬링필드 현장인 쯔응아익(청아익) 대량학살센타로 출발하였다. 쯔응아익(청아익) 대량학살센타에 도착하여 입장료(오디오 청취기 포함 6달러)를 내고 들어가면 17층 높이로 쌓아올린 유골이 보관되어 있는 위령탑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쯔응아익(청아익) 대량 학살센터의 17층 높이로 쌓아올린 유골이 보관되어 있는 위령탑

 

각각 장소에 있는 오디오 청취 번호를 누르면 끔찍한 내용들이 나왔다..

 

이곳은 당시 중국인들의 묘지였던 곳으로 크메르 루즈는 이곳을 대량학살센타로 사용하였으며, 1976~1978년 까지 3년동안 한번에 50~70명이 끌려 왔었고 많을 때는 300명씩 끌려왔다고 한다. 500m근방에 군부대가 있고 수감자들은 밤에 이곳에 도착하여 그들이 처형장으로 끌려왔는지 모르게 진행되었으며 수감자는 한명씩 처형되었다. 크메르 루즈에 대항하는 자는 물론 의사, 변호사, 선생들 같은 지식인, 승려, 수녀들, 안경을 쓰고 있는 자, 손이 깨끗한 사람들 모두가 끌려왔다. 거짓 자백서 진술을 강요당하고 가족, 친지들까지 진술토록 하여 그들도 끌려오게 하였다.

 

 크메르 루즈의 잔인한 학살현장에서 오디오를 청취하는 여행객들..

 

폴포트는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던 중 모택동사상에 반해 1940년 공산주의에 입당하였고, 선생으로 근무하면서 동료교사들은 동조자로 가입시켜 세력을 키워 집권을 한 후 절대 권력으로 시골 출신의 무식하고 무지한 10대의 젊은이들을 강제징집하여 군대를 양성하였다. 폴포트 정부는 도시사람들은 악한 자들이고 쓰레기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폴포트 정부는 트럭으로 실려 왔던 모든 사람들을 정확히 기록하였다. 10대의 징집병이었고 뚜울술랭에서 이곳 쯔응아익(청아익) 대량학살센타로 왔었던 증언자에 의하면 그의 임무는 수감자들을 명부에서 확인하여 빠짐없이 기록하고 그들이 처형되도록 하였다고 한다. 크메르루주가 사람들을 죽이는 방법은 총알은 비싸기 때문에 쓰지 않았고 그 대신에 DDT를 음식물에 섞어서 죽이기도 하고, 톱니이빨 같이 생긴 사탕야자나무의 줄기로 사람의 목을 베어 죽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지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네요..

 

캄보디아 전역에 이런 대량학살장소는 129개(?)가 있었고 그곳에서 처형을 했다고 한다. 8번 창고는 농기구를 보관하던 곳으로 구타당한 후 끌려온 사람들은 스스로 웅덩이를 파고 꿇어앉은 후 도끼, 망치 등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폴포트는 ‘실수로 무고한 자들을 죽이는 것이 실수로 살려 주는 것 보다 낫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말 인간이라기보다는 악마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잔인성이 우리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유골 중에는 미국인6명을 포함한 서양인 기자들 9명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였던 도구들..

 

당시 이 지역은 과수원이었는데 국가 소유로 몰수되었으며, 끌려온 도시인들은 쌀 수확량을 3배로 하라고 하고 하루에 죽 한 그릇을 먹고 노동을 하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갔으며, 감시자들도 수확량을 확보하지 못한 것에 두려워했다.

연꽃이 피어 있는 이 아름다운 곳에서 끔찍한 살인이 3년동안 지속되었다니..

 

전범자들은 2007년 전범재판을 받았고 2017년 현재도 재판 중이라고 한다. 폴포트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1979.1월 태국 접경으로 도피하였고 그 당시에도 영, 미, 독일 등 서방에서는 캄보디아의 내부 사정을 알지 못해 크메르루즈 정부를 정통정부로 인정하고 UN에서도 의석을 차지하여 재정지원도 받았다고 하니 정말 말이 나오지 않는다. 크메르 루즈는 그곳에서 병사들을 재집결 재건작업을 하던 중 1998년 내분으로 갈려졌었고 폴포트는 가택연금을 당한 후 1년만인 1998.4.15일 죽었으며 그 때가 82세였다. 폴포트는 두 번 결혼하고 말년까지 평온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청아익 무덤 중에 가장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여성들과 아이들이 발가벗겨져 죽어 있었던 곳으로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엄마를 죽였으며, 나중에는 아이까지 죽였다고 한다. 크메르루즈에 전해오는 두 번째 얘기는 ‘잡초를 뽑으려면 뿌리까지 뽑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즉 이는 복수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보리수나무에서 확성기를 틀어 희생자들이 마지막으로 죽어가면서 했던 비명 소리를 막았다.

 

기념비내부는 17층으로 되어 있고 10층까지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건물은 힌두교와 불교양식이 혼재하고 건물바깥쪽의 새는 나가스라는 새로써 크메르인의 선조를 상징하고 있으며 적들과 함께하면 평화의 상징이 된다고 한다.

 

10층까지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캄보디아 정부가 5월 20일을 ‘학살 정권 피해자 추모의 날’로 지정했다. 이날은 1975년 4월 17일부터 1979년 1월 6일까지 폴포트 정권하에 사망한 자들을 기리기 위한 날이다.


다음은 뚜얼슬랭 대학살 박물관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