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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대명산 산행기/서울,경기

남한산 종주(벌봉, 한봉 포함)('20.5.23)로 700회 산행을 돌아보다..

by 산사랑 1 2020.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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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산행(2020. 5.23일 토요일)】인기 백대명산 제95위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으로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 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官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百濟)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溫祚王代)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 (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 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 결(結)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仁祖)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여장(女墻) 1,897개·옹성(甕城) 3개·성랑(城廊) 115개·문 4개·암문 16개·우물 80개·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純祖)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正祖)22) 한 남루(漢南樓)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을 1829년(순조(純祖) 29)에 수리하였다. 관해(官해)로는 좌승당(左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을 비롯하여, 비장청(碑將廳), 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鐘閣)·마구(馬廐)·뇌옥(牢獄)·온조왕 묘(溫祚王廟)·성황단(城隍壇)·여단(여壇)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守禦廳)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 융대장(摠戎大將) 이서(李曙)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縝)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檀)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조선시대 왕의 출입문인 남문..

 

건강셀프등산회 제700차 산행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남한산을 추진하여 많이 다녔던 일주코스에 그동안 다니지 않았던 벌봉과 한봉을 둘러보았다. 산행은 남문유원지남문 유원지 입구 ~ 남문 ~ 동문 ~ 벌봉 ~ 한봉 ~ 벌봉 ~ 서문 ~ 남문 ~ 남문유원지로 진행하였으며, 약 6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산행은 남문유원지 입구 ~ 남문 ~ 동문 ~ 벌봉 ~ 한봉 ~ 벌봉 ~ 북문 ~ 서문 ~ 남문 ~ 남문유원지의 원점회귀로 진행..

 

남문주차장에서 남문 가는 길의 모습(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정자에 바둑두는 분들이 보이지 않고, 수국과 붓꽃 등이 피어 있고)

 

남문은 남한산성의 정문으로 4대문 중에 규모가 가장 크며, 조선시대 임금들의 출입문으로 1,779년(정조 3년)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

 

남문 앞의 500년 된 느티나무는 고사 직전이었고,남장대터와 제2옹성..

 

남한산의 성곽길은 성곽 축성술이 특이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일조를 하였다...

 

동문 방향의 절(단천님께서 이 절은 비구니들이 수행하시는 망월사라고 합니다)을 당겨봅니다..

 

동문..

 

동문 앞의 단풍나무는 벌써 붉게 물들었고..

 

 

황진이가 심명한 불도를 설법하여 이에 감명 받은 기생 하나가 자괴하여 투신자살한 지역인 송암정 앞에 있는 生과死의 나무

 

장각사 절의 보호수..

 

장경사 신지옹성..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걷는 그 자체 만으로도 힐링이 되고, 장경사 신지 옹성도 둘러보다..

 

벌봉 가는 길,,

 

벌봉으로 갈 수 있는 제3 암문의 모습(아래)..

 

벌봉 가는 길에서 본 동장대터 부근..

 

 

12 암문(남한산에는 16 암문이 있음)과 동장대터(남한산 서봉)..

 

벌봉 가는 길의 성곽은 전혀 보수가 되어 있지 않고, 벌봉은 정상석이 없이 나무에 표시만 있네요..

 

벌봉은 13 암문을 지나서 가며, 벌봉 가는 길의 성곽은 400여 년간 방치되어 상당히 황폐되어 있었다..

 

벌봉에서 한봉 가는 길에 봉암산성 신축비가 있고, 성곽은 거의 방치되어 있습니다..

 

벌봉에서 한봉까지는 1,6km 거리이며, 외동장대터(숙종 12년인 1686년 봉암성 축성 때 누각 없이 건립하였다고 추정)와

한봉성(병자호란 이후 숙종 19년인 1693년 신축한 것으로 봉암성 동남쪽에서 한봉까지 쌓은 외성으로 길이는 1,093m라고 함)

 

한봉성 정상석도 초라합니다..

 

400년간 방치되어 성곽에는 잡초들이 덮고 있네요..

 

 

한봉에서 벌봉 가는 길에 본모습들..

 

 

제3암문을 지나 다시 성곽을 따라 진행하였으며, 북문까지 가는 길에는 멋진 곳이 많이 있습니다..

 

성 바깥에 있는 멋진 소나무..

 

문입니다..

 

북문에서는 성 외곽 길을 따라 걸었으며, 바깥쪽에서 본 성 안쪽의 소나무들이 멋집니다..

 

남한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주봉 옹성..

 

연주봉 옹성에서의 조망도 좋습니다..

 

연주봉 옹성에서 본 롯데타워는 석양빛을 받아 황금색을 띠고 있습니다('19.9.13일 사진)..

 

서문으로 서문에서부터 다시 성 안쪽 길을 따라 진행합니다..

 

넓은 공터에서 술을 팔았는데 지금은 마시지 못하게 하고 있으며, 수어장대는 정비공사로 출입을 통제하여 바로 남문으로 진행하였다..

영춘정 앞에 있는 아름다운 소나무들과 이코스에 있는 소나무 숲길도 상당히 보기 좋습니다..

 

현재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수어장대(청량산 정상(497m)/'20.2.1일 사진)..

 

《장대》

장대는 전쟁 시 장군의 지휘소로 남한산성에는 5개 장대가 있었으나 현재는 영조 때 증축한 수어장대만 보존되어 있다.(수어장대는 최초 서장대로 단층이었으나 영조가 2층으로 증축하였다)

 

 

남문인 지화문으로 이곳에서 다시 남문주차장으로 진행하여 약 6시간 30분에 걸친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산행후기】

건셀 700회 산행으로 지리산 종주를 하려고 했으나 코로나 19로 인하여 다음에 가기로 하고 그 대신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남한산을 걸으면서 700회 산행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건셀은 '06.11.18일 1회 관악산 산행을 시작으로 약 14년 동안 매주 국내․외의 유명산을 찾았다. 대다수 산행은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행복한 산행을 할 수 있었지만 뜻하지 않은 위기도 다수 있었으나 슬기롭게 극복하여 현재까지 산행을 이어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82차 구봉산 산행('08.8.12) 산행을 앞두고 지주막하출혈이 발발하여 95차 청계산 산행('08.10.18)까지 약 두 달간 산행을 중단한 것이 첫 번째 위기였고, 두 번째는 270차 화악산 산행('12.3.17) 당시 일행들이 선두에서 눈길을 헤치고 가던 나에게 알리지도 않고 임도를 따라 자기들끼리 갔던 산행으로 산악인의 자세에 대한 등산회에 대한 실망으로 3주 만에 산행을 재개했던 것이다. 산행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한다는 사실을 각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등산회 차원에서는 300회 설악산 공룡능선('12.10.13) 산행으로 당시 산행대장의 차량 운전 무료봉사 중단으로 첫 번째 위기가 있었으나 수고비를 지원하는 선에서 잘 해결하였고, '495차 봉래산+동강 래프팅 산행('16.7.23) 당시 회원 간의 결혼 문제가 야기되어 그동안 등산회를 이끌어 왔던 산행대장이 탈퇴하는 두 번째 위기가 왔었으나 나머지 사람들의 합심 하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 이외에도 작은 위기들이 여러 번 있었으나 슬기롭게 헤쳐나갔으나 회원들이 크고 작은 부상 등의 이유로 빠져나가 지금은 실질적으로 세 사람만 산행을 하는 실정에 도달하였다.

 

언제, 어느 순간에 혼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1,000회까지 산행을 하겠다는 목표가 있고 산행에 대한 열정이 살아 있기에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이어갈 것이다. 주말 산행을 하면서 애경사 등에 빠지게 되는 등 희생이 강요되는 면은 있으나 심신의 안정과 건강이 함께 할 수 있으니 이 보다 좋은 운동은 없는 것 같다. 700회 산행을 돌아보며 1,000회까지 산행이 계속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