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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마산 ~ 망우산 연계산행(20. 9. 12)

by 산사랑 1 2020.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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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셀프등산회 제717차 산행은 용마 ~ 망우산이 추진되었다.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산행이 진행되어 조망이 다소 제한되었으나 우중산행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산행은 용마산역 2번 출구 ~ 용마산 정상 ~ 망우산 ~ 망우리 역으로 추진하였다. 이번 산행에서 그동안 찾아보고 싶었던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소를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코로나 19 확산세가 둔화되어 마스크 없이 산행을 할 수 있는 그날이 빨리 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용마산 정상..

 

 

용마산역에서 용마봉 정상까지는 약 1.9km 입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에서도 북한산 능선이 조망되고..

 

 

롯데타워도 보입니다..

 

 

 

중간 조망처에서 본 서울의 모습으로 롯데타워, 관악산, 중랑천, 안산, 인왕산, 북악산, 삼각산 등이 보입니다..

 

당겨본 삼각산의 위용..

 

당겨 본 불암산, 수락산..

 

 

가 오락가락 계속해서 내립니다..

 

수도 서울이 산(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네요..

 

 

용마산 정상..

【용마산】

용마산(596m)은 경기도 하남시, 광주시에 걸쳐 있으며, 정상에서 북쪽으로 예봉산, 적갑산, 운길산이 손에 잡 힐듯 보인다. 동쪽으로는 중원산, 유명산, 백운산, 용문산이 멀리 보이며 서쪽으로는 아차산과 그 넘어 북한/도봉 주능이 남쪽으로는 남한산의 줄기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발아래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양수리) 등 팔당호가 펼쳐진다.

 

차산으로 가려다가 사람이 적은 망우산으로 진행을 합니다..

 

 

 

곳에서 아차산과 망우산이 갈라집니다..

 

암사대교 뒤로 예봉산, 검단산이 희미하게 형채만 보입니다..

 

 

 

 

 

 

 

산 정상 역할을 하는 망우산 1보루..

 

망우 공동묘지

 

 

강화여행을 하면서 죽산 조봉암 선생의 생가터와 추모비를 보고

죽산 선생의 묘소가 망우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찾아보고 싶었는데 차도 옆에 있더군요..

 

【죽산 조봉암】

조봉암(曺奉岩, 1899년 10월 29일(음력 9월 25일) ~ 1959년 7월 31일)은 일제 강점기에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경유하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다. 상하이와 국내를 오갔으며 1927년에는 임정 요인들을 상대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고 문화부책에 선출,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불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송환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고 출옥하였고,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 비밀리에 활동하다가 1945년 1월 다시 검거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석방되어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1946년 5월 박헌영(朴憲永)과의 갈등을 계기로 사상 전향하여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지주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주관하여 성사시켰다. 1948년 이후 윤치영(尹致暎) 등과 이정회, 대한국민당 등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 대통령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8년 상인 양명산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자금을 건네받았다는 혐의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심 결과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의 사형집행은 당대에도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1년 1월 20일 대한민국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복권되었다. 2011년 국가보훈처는 조봉암이 1941년 일제에 150원의 국방헌금을 냈다는 당시 매일신보의 신문기사가 나왔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심사를 보류하였으나 현재 그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추진 중에 있다.

 

조봉암 추모사업회 주관으로 2000년 5월 조봉암 추모비를 건립하기로 하고 모금 운동을 벌였다. 새얼 문화재단이 인천 지역 정치인·학계·교육계 인사 등 112명으로부터 2211만 원을 거두어 추모사업회에 전달하기도 했으며 , 모두 6천여 만원의 돈을 모아 2001년 7월 6일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강화역사관 입구 진해공원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죽산 조봉암 선생의 묘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산 사색의 길 동락천 약수터 근처에 있다.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형돼 정부가 비문을 새기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창령 조 씨 문중에서도 비문 제작을 거부했기 때문에 비석 뒤에 비문이 없다. 묘소 앞 돌에 새겨진 죽산의 어록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가 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한가?」(출처 : 위키 백과에서 발췌)

 

 

강화 읍사무소 앞쪽에 있는 조봉암 선생 생가터에는 표시석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30.3월 소창길을 걸을 때)..

 

강화 연미정 가는 길에 있는 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비(20. 8.15)

 

조금 아래쪽에 있는 한용운 묘소도 둘러보고..

 

많은 독립유공자들의 묘소가 있는 망우리공원 인문학길 '사잇길'..

 

 

망우리에 있는 애국지사들..

 

비가 오락가락 내려 당초 둘러보려던 아차산은 생략하고 약 2시간 30분간의 산행을 마무리하고 망우리 역으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