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순성길 숭례문 구간】
‘한양도성 순성길’ 숭례문 구간은 돈의문 터~창덕여중~이화여고~러시아 대사관~소의문 터를 잇는 1.8km 구간이다. 일제가 1914년과 1915년 소의문(소덕문, 서소문)과 돈의문(서대문, 새문)을 철거하고 한양도성은 멸실한 구간으로서, 한양도성 전체 구간 중 가장 많이 훼손된 곳이기도 하다. 이 일대는 한성교회, 이화여고 등 사유지와 도로 등으로 사용돼 순성길을 탐방하려는 시민들은 배재 어린이공원으로 우회해야 했다.
국보 1호 숭례문
【숭례문】
조선시대 서울 성곽의 정문이며 1398년에 완성되어 1448년에 개축되었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1962년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로 숭례문이라 하였다. 1934년 일본이 ‘남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 ‘숭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누각형 2층 건물로 석축 중앙에 무지개 모양의 문이 세워져 있고,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다포 양식의 공포를 얹은 위층은 외삼출목, 아래층은 외이출목으로 구성되어 조선 초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008년 2월 10일 방화 화재로 석축만 남긴 채 누각 2층 지붕이 붕괴되고 1층 지붕도 일부 소실되었다. 5년여에 걸친 복원 공사 끝에 2013년 5월 4일 준공·공개되었다. (출처 : 다음 백과)
숭례문 구간 : 돈의문터~창덕여중~이화여고~러시아대사관~소의문터를 잇는 1.8km
숭례문 ~ 정동구간은 한양도성 순성 구간 중 가장 많이 훼손된 곳이고 평지로만 다니는 구간으로 코스가 단순하여 주변 일대를 둘러보면서 진행하기로 하였다. 숭례문을 따라가면 염천교와 수제화 거리가 있어 둘러보았으며, 숭례문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는 조선시대 난전시장인 칠패시장 터를 본 후 숭례문으로 돌아 와 본격적인 순성길을 걸었다. 순성길은 숭례문에서 차도의 붉은색을 따라 성곽이 연결되며, 맞은편에 있는 대한상공회의소로 이어졌다.
숭례문 밖의 연못인 남지터..
염천교..
【염천교】
중구 의주로2가 179번지 봉래교 서쪽에 있는 다리이다. 이곳에 화약을 제조하는 염초청(焰硝廳)이 있었다고 해서 염초청 다리라고 하였고 한자명으로는 焰廳橋 혹은 焰硝廳橋라고 썼는데, 음이 변하여 염천교(鹽川橋)가 되었다. 일명 염춘교라고도 하였다. 이 다리는 1940년대 개수 때 돌로 만든 타일을 붙여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석조타일 바닥이었으나 1970년대 말 서울역~충정로 간 지하차도를 만들면서 석조 타일을 아스콘 포장으로 바꾸었다. 지금의 다리는 폭 30.8m, 길이 52.1m로 (주)건설산업에 의해 1978년 5월 30일 준공되었다. (출처 : 다음 백과)
염천교 아래로 열차가 지나갑니다..
염천교 다리 건너에 있는 수제화 거리..
【염천교 수제화 거리】
1945년 광복 후 미군들의 손상된 미군 군화를 구매하여 국군 군화 및 다양한 구두로 재탄생시켜 판매하였다. 이 시기는 염천교 수제화 거리의 전성기 시절로 불리며, 당시 이곳은 대한민국 내 구두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최고, 최대의 도매 상권이었으며 주변에 많은 양화점도 같이 발달하였다. 1974년 당시 한국의 자장면 한 그릇의 가격은 50원인데 비해 남화는 14,000원, 여화는 9,000원 정도로 매우 비싼 편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수제화 공장이 성동구 성수동으로 이전하고, 2000년대 들어 값싼 중국 제품이 등장하면서 이곳의 수제화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500군데 이상이었던 수제화 공장과 상점은 100여 곳 정도만 남았고, 염천교 수제화 거리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성수동 수제화 거리에서는 성수동의 공장에서 생산한 수제화가 외부의 도·소매 매장에서 유통되는 것과 달리, 염천교에서는 이 일대에서 생산한 수제화가 이곳의 매장에서 바로 유통된다는 차이점이 있다. 성수동보다 기술자가 적고 공장이 영세한 편이라, 제작이 단순하고 디자인이 유행을 잘 타지 않는 남성화와, 40대 이상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화가 주로 제작·판매된다.(출처 : 다음 백과에서 발췌)
칠폐시장 터..
【칠패시장(七牌市場) 터】
칠패시장(七牌市場) 터는 지금의 서소문 밖에 있던 난전시장(亂廛市場)이 있던 곳이다. 칠패시장은 조선시대 이현(梨峴)·종가(鍾街) 등과 함께 서울의 가장 큰 상업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시전(市廛)과 마찬가지로 미곡, 포목, 어물 등을 비롯한 각종 물품이 매매되던 곳으로,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칠패로 36 일대에 해당한다.
숭례문에서 차도에 붉은색으로 된 부분이 예전 성곽터로 대한상공회의소로 이어진다..
대한상공회의소에서 5분 거리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순교했던 소의문(서소문 터)가 있었으며, 국수 전골집인 이화고려정 옆에 예전 부채표 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구 동화약방) 옆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울 연통부지’를 둘러보았다. 연통부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국내 연락의 거점 역할을 한 곳으로 상해와 국내의 연락과 독립자금을 모아 전달하였다고 한다. 연통부를 둘러본 후 다시 성곽길 흔적을 따라 4~5분 정도 가면 1885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배재학당을 설립한 곳인 아펜젤러 기념공원이 나왔다.
소의문 터..
【소의문 터】
조선 한성의 4 소문 중 하나. 다른 이름으로는 서쪽에 있는 작은 문이라고 해서 서소문(西小門)이라고도 하며, 과거에는 소덕문(昭德門)이라고 하였다. 1396년 건설되어 광희문과 함께 시체를 밖으로 빼내고 일반적인 통행로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소덕문(昭德門)이었지만, 1744년 영조 때 문을 개수하면서 소의문(昭義門)으로 고쳤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처형장 중 한 곳이었는데 특히 1800년대 중반 이후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절 새남터 성지, 절두산 성지 등과 더불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특히 새남터 성지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등 사제들이 다수 순교한 것과 달리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평신도들이 주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곳에 천주교 순교자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건립돼 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도 2014년 한국을 찾았을 때 이곳을 참배하며 순교자들을 위한 기도를 했다. 인근 충정로의 약현성당에 그 기념관이 있으며, 서소문 공원 내에 성지가 조성되어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소의문 지역에 도로와 경의선 철도를 낸다는 명분으로 소의문을 헐어버렸다. 소의문 터에 있던 재활용 쓰레기처리장과 공영주차장 부지를 재건해, 2019년 6월 1일에 서소문 성지역사박물관이 개관하였다.(출처 : 나무워키에서 발췌)
임시정부 서울 연통부지(구 동화약방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울 연통부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울 연통부지'는 지난 1995년 설치돼 20년이 넘는 세월 대한독립의 역사를 알려 왔다. 표석 뒤편에는 동화약방의 후신인 동화약품의 옛 건물이 '연통부지' 표석을 굳게 지키고 있다. 연통부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국내 연락의 거점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가 관할해 상해와 국내의 연락과 독립자금을 모아 전달하는 기능을 한 것이다. 표석을 설치한 서울시도 연통부가 "서울시청과 비슷한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궁중 선전관 출신인 동화약품 창업자 민병호 씨는 대한제국의 식산흥업정책에 부응해 1897년 자신의 집에서 동화약방을 만들고 곧바로 사장에 아들 민강 씨를 앉혔다. 독립운동에 관여해 온 민 사장은 동화약방 설립 직후부터 자신들의 대표상품 활명수를 판매한 금액으로 독립 자금을 조달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민 사장은 결국 1921년 일본의 감시망에 걸려 수차례 옥고를 치르다 모진 옥살이와 고문 후유증으로 1931년 별세했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고, 그의 시신은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한국 최장수 브랜드 활명수는 출시된 지 100년이 훨씬 넘은 지난해 갤럽 소비자 조사에서 소화제 부문 인지도 99%, 선호도 1위를 차지했다.(출처 : 다음 뉴스에서 발췌)
은행나무가 곱게 물든 길을 따라가다 만난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평안교회..
아펜젤러 기념공원은 선교사 탄생 160주년을 기념해 2년 전(2016년)에 새롭게 조성되었으며, 기념공원 한쪽에는 1895년에는 독립협회가 독립신문을 발간했던 독립신문사 터가 있었다. 기념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나왔으며, 박물관은 코로나 19 여파로 문을 닫고 있었다. 그리고 기념공원에는 아펜젤러 동상과 수령 573년(2020년 기준)의 향나무 한그루가 있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아펜젤러 기념공원을 구경한 후 러시아대사관으로 이동하였다. 러시아대사관 안으로 한양도성 성벽이 이어져 있으나 개방하지 않아 들어갈 수 없었다.
아펜젤러 기념공원(배재학당)/ 독립신문사터가 있네요..
아펜젤러 동상과 수령 573년(2020년 기준)의 향나무 한그루가 있습니다..
【아펜젤러】
1882년 펜실베이니아 주 프랭클린앤드마샬대학을 거쳐 그해 뉴저지 주 드류 신학교를 졸업했다. 1884년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의 한국 선교 결정에 따라 1885년 4월 2일 한국에 입국하여 한국선교회 및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1887년 한국선교부 감리사로 있으면서 학교와 병원 등에 복음전도의 여러 사업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29일 서울에 벧엘 예배당(지금의 정동제일교회)을 설립했으며 1888년에는 H. G. 언더우드, G. H. 존스 등과 함께 지방을 순회하면서 전도활동을 벌였다. 1890년 한국성교서회(韓國聖敎書會)를 창설하여 1892년 회장직을 맡는 등 성서 번역사업에 큰 기여를 했다.
1895년에 월간지〈한국 휘보 The Korean Repository〉의 편집일을 맡았으며, 1897년에는 한국말로 된 최초의 종교 신문인 〈죠션 크리스토인회〉를 창간하여 선교사업 외에 민족계몽운동에도 조력했다. 1902년(광무 6)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그가 탄 배와 일본 상선이 충돌하여 익사했다. 큰아들은 배재학교 교장을, 큰딸은 이화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출처 : 다음 백과)
아펜젤러 기념공원에 있는 구절초..
러시아 대사관 안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러시아 대사관을 지나 서울시립미술관(서소문 본관)으로 이동하였다. 시울시립미술관은 1928년 일제에 의해 경성재판소로 지어진 건물로 원래 대법원으로 사용되다가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옮겨간 뒤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치형 현관의 특징적인 전면부를 보존하여 구 대법원 청사의 상징성을 잘 표현했다. 건축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3월 2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구 대법원이었던 서울시립미술관/대한독립선언서를 필사하는 동상..
미술관 바깥에는 조각품들이 곳곳에 있었으며, 잠시 둘러보고 있는데 덕수궁 수문장 교대 병력들이 행사를 마치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길은 자연스럽게 은행나무가 곱게 물들어 있는 덕수궁 돌담길로 이어졌으며, 서울시청 서소문 청사 13층에 위치해 있는 정동전망대에서 단풍이 든 모습을 보기 위하여 찾아갔으나 이곳도 코로나 19로 인하여 문을 닫아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최우람 작품 '숲의 수호자'
배현경 작품 '생각하다'
붉은 단풍이 곱게 물들었네요..
덕수궁 돌담길에 집합한 수문장 교체 행사병력..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덕수궁 돌담길..
'19.2월에 정동전망대에서 본 덕수궁의 전모..
다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인 정동 제일교회를 지나 은행나무가 곱게 물들어 있는 이화여고 담벼락 길을 따라 이동하다가 한국 가톨릭 수도원 역사가 시작된 정동 수녀원 자리가 있는 정동공원을 찾았다. 정동공원은 한국 가톨릭 수도원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옛 러시아공사관 터와 고종의 길로 이어지는 중정 스타일의 소공원이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경운궁(덕수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피난길인 고종의 길이 끝나는 장소로 옛 정동수녀원 자리이다. 정동공원 위쪽에 자리 잡은 옛 러시아공사관은 현재 공사 중이었으며, 다시 길을 따라 7분 정도 진행하여 돈의문 터에 도착하여 한양도성 숭례문 ~ 정동구간을 마무리하였다.
감리교로 독립운동 중심지인 정동 제일교회..제일교회..
은행나무가 곱게 물들어 있는 이화여고 담길..
한국 가톨릭 수도원 첫자리인 정동 수녀원이 있었던 정동공원..
현재는 보수공사가 진행 중인 옛 러시아공사관으로
공사장 가림막에 공사관의 옛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네요..
【옛 러시아공사관】
정동에서 제일 높은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러시아공사관은 사대문 안을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부지였다. 지금처럼 높은 건물이 없던 구한말 당시에는 경복궁과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은 물론 주변의 여러 나라 공사관 동정을 이곳에서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를 준비했던 러시아공사관은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이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전망탑과 지하 2층을 제외하고 대부분 파괴됐다. 현재는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며 공사장 가림막에는 공사관의 옛 모습들이 전시돼 있다. (출처 : 다음 백과)
수령 56420년 기준) 된 회화나무..
거대한 은행나무..
오늘의 목적지인 돈의문 터..
【돈의문(서대문)】
서울 성곽의 4대 문(四大門)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원래 자리가 경희궁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90년대 말쯤에 찍은 사진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 견고하게 쌓은 돌축대 한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虹霓門)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 지붕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평면 규모나 구조상의 특징은 알 수 없다. 다만 지붕 위에 마루를 양성하고 취두(鷲頭 : 망새)·용두(龍頭)·잡상(雜像) 등을 배열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처음 세워진 것은 1396년(태조 5)으로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門)이 완성되었던 때이다. 태조 때인 1413년에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대신 태종 대에 서전문(西箭門: 서살문)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1711년(숙종 37) 9월에 고쳐지으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숙종 때 고쳐 지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 서북쪽의 관문(關門)으로 사용된 중요한 사적인데, 일본인들에 의해 함부로 철거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출처 : 다음 백과)
돈의문 터 맞은편에 있는 돈의문 박물관마을..
돈의문 박문관 뒤쪽 올라가는 계단..
새문안 극장,등 70 ~ 80년대 모습..
숭례문 ~ 정동 구간은 성곽길이 가장 많이 훼손된 구간으로 성곽을 걷는 의미는 느낄 수가 없으나 이곳은 우리나라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구간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구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트레킹을 마무리하고 근처에 있는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을 둘러보았다.
다음은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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