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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한양도성 순성길

한양 도성 2구간 낙산구간(혜화문 ~ 흥인지문)걷기(20.10.9)

by 산사랑 1 2020.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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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낙산구간】

 

낙산구간은 인구가 많고 시대가 현란하다. 낙산구간 성곽 너머로 선명하게 보이는 신당동, 창신동, 이화동, 돈암동, 성북동 등은 조선 시대 때부터 존재해 온 엄연한 고도의 일원들이다. 조선의 흥인지문이 열리면 성문 밖 주막거리에서 묵고 있던 상인들이 차례차례 입성해 장을 열었고, 그것이 오늘의 동대문 시장이 되었다. 창신동은 우리나라 근대 상공업의 중심이었고, 지금도 골목골목에서 사람과 기술이 만나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봉제, 의류, 완구 등은 물론 유통 회사들도 곳곳에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낙산 언덕을 뒤덮고 있는 이화동 역시 조선시대 동인과 서민들이 모여 살던 밀도 높은 마을이다.

 

한양도성 낙산구간은 사람의 숲답게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문을 열고 있는 문화 거리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화동이 있다. 이화동 성벽 마을은 바로 그곳 골목에 있는 다닥다닥한 집들을 말한다. 전망 좋고, 운동하기도 편하고, 그리고 성곽길을 걷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눌 수 있는 곳이다. 이른바 ‘벽화 마을’로 불리는 이화동 일대는 2006년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재생 작업이 이뤄지기 시작, 오늘에 이른다. 벽화 마을로 소문이 난 뒤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관광지가 되었다. 그 후로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화동은 다시 1950년대 후반에 형성된 조용한 마을로 되돌아갔고, 지금은 소곤소곤한 골목이 되어 달라진 세상과 새로워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출처 : 매일경제/20. 7. 2)

 

10.9일 한글날 날씨도 좋고 하여 한양도성 2구간 낙산구간(혜화문 ~ 홍예지문)을 걸었다. 길을 걷는 동안 주변의 역사적인 시설들인 삼군부 총무당(총리기무아문), 비우당(이수광이 살던 초가집), 자주동천(단종비가 샘물을 길러 자주색 물을 들인 곳), 동망정(단종비가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은 곳), 이화정(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사저) 등을 둘러보았고 이화벽화 마을 등 아름다운 풍경들도 둘러보았다.

 

혜화문은 부암동 창의문에서 백악산을 너머 성북동을 지나 창경궁로 북쪽에 이르는

서울한양도성 백악구간의 끝이자 시작하는 지점으로 이곳에서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혜화문】

혜화문(惠化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 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동쪽의 소문이다. 숙정문을 대신하여 한양의 북쪽 관문 역할을 하였다. 동소문(東小門)이라는 속칭이 있는데, 이는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다. 혜화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1592년 문루가 불타 1744년에 재건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파괴되었고 1994년에 원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13m 이동하여 복원되었으나, 모양도 실제와 같지 않게 엇비슷하게 지어진 것이며 현판의 글씨 또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여 있다.

 

본래 홍화문(弘化門)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발음이 같다 하여 혜화문으로 이름을 고쳤다. 일반적으로 홍예 안쪽 천장에는 용이 그려져 있어야 하나, 혜화문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문 주변에 새가 많아 용 대신 새들의 왕인 봉황을 이용하여 새들을 쫓고 악한 기운을 막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출처 : 위키백과)

 

삼선동 369 성곽마을..

 

성곽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오는 장수마을..

 

장수마을은 나이 든 사람들이 많이 사는 낙산 동쪽 비탈 지역의 이름이다. 오래전 뉴타운 건설이 계획되기도 했으나 주민 투표를 통해 그 결정을 뒤집고 도시 재생 절차를 밟아 아름답고 단출한 마을로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좌측은 혜화문, 우측은 흥인지문에 있는 각자성석..

 

삼군부 총무당..

 

 

【삼군부 총무당】

삼군부 총무당(三軍府總武堂)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 한성대학교 인근에 있는, 조선 말기의 군사기관이었던 삼군부(三軍府)의 중심 건물이다. 1978년 12월 18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삼군부의 임무는 군무를 통솔하고 숙위 문제를 총괄하는 동시에 변방에 관한 일체의 사항까지도 관장하는 것이었다. 삼군부가 완전한 조직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67년이었다. 삼군부는 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금위영·용호영 등 5개 군문을 비롯하여 전국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병인양요ㆍ신미양요 때에 위세를 떨쳤다가, 개항 이후인 고종 17년(1880년)에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총무당은 청헌당(淸憲堂)·덕의당(德義堂)과 함께 원래 삼군부 내에 있었던 건물로서, 그곳에 남아 있다가 1930년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덕의당은 언젠가 없어졌고, 청헌당은 1967년 정부종합청사가 건립될 때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경내로 옮겨졌다. 총무당 건물은 고종 5년(1868년) 삼군부의 무략(武略)을 총괄하는 청사로 지어졌다. (출처 : 위키백과에서 발췌)

 

 

낙산구간은 고양이들의 천국입니다..

 

성곽은 시대에 따라 수시로 보수되어 모양이 다 다릅니다..

 

성곽에서 본 모습으로 북한산 능선이 시원하게 조망됩니다..

 

 

낙산공원..

 

선시대 대표 실학자인 이수광의 거처였던 비우당..

 

【비우당(庇雨堂)】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재된 풍물시장 바로 옆에는 우산각(雨傘閣)이라는 초가로 된 정자가 있다. 조선 세종 때 대사헌에 오른 하정(夏亭) 유관은 매우 검소하고 청렴해 비가 오면 자신이 사는 오두막집에서 물이 새 우산을 받치고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유관의 집을 우산각, 신설동과 보문동 사이의 유관이 살던 마을을 우산각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관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수광의 외가 6대 조상으로 비우당을 상속했지만 임진왜란 때 집이 불에 타버렸다. 이수광은 이곳에 비우당(庇雨堂)이라는 지푸라기 지붕의 작은 초가집을 지어 유관의 청렴성을 알렸다. 이런 연유에서 청계천에는 비우당교라는 다리가 있고 신설동로터리에서 신답초등학교에 이르는 도로에는 하정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출처 : 서울신문을 중심으로 재편집/20. 9. 6)

 

비우당 담벼락에 있는 자주동샘자주동샘(단종비가 샘물을 길러 자주색 물을 들인 곳)

【자주동샘】

조선 초 단종비 송씨(정순왕후)는 영월로 귀양 간 단종을 애절하게 기다리며 세 시녀와 함께 숭인동 17번지(청룡사 옆) 정업원(淨業院)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명주를 짜서 댕기, 저고리 깃, 옷고름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정업원에서 서쪽으로 300여 미터 떨어진 화강암 바위 밑에 샘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이 물에 명주를 담갔더니 자주색 물이 들었다 한다.

 

자주동샘으로 인해 그 일대는 자지동천, 자줏골, 자주동과 같이 자주색과 관련된 명칭이 많으며, 자주동샘 인근에는 청룡사, 동망봉 등 단종애사에 얽힌 명소가 산재해 있다. 자주동샘 바로 옆에는 자줏물이 든 명주를 널어 말리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자지(紫芝)란 자줏빛을 띄는 풀이름을 말한다.

 

 

비우당과 자주동샘을 둘러본 후 다시 낙산공원으로 올라와 이화장과 이화 벽화마을을 둘러보았다.

 

이화 벽화마을(梨花 壁畵마을)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에 위치한 벽화마을로 대학로 동쪽, 낙산공원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이화동은 주택이 노후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으나 2006년 노후 방치된 지역의 정주 여건 개선의 일환으로 ’ 06년 9월 ~ 12월까지 이화마을에 벽화와 조형물이 세워져 이화 벽화마을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이화 벽화마을은 TV 프로그램이나 각종 드라마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관광객들의 명소가 되었다.

 

508 구게로 KBS에서 방영을 했다고 하네요..

 

금지에 그려진 꽃과 나비 그림에서 묘한 느낌이 드네요..

 

소통과 나눔의 장마당도 문을 닫아 이화마을이 점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군요..

 

만 초대 대통령의 사저인 이화장으로 지금은 출입을 통제하고 있더군요..

 

【이화장】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1번지에 위치한 건축물로 사적 제4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집은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이 안정된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불편한 생활을 하는 것을 알게 된 권영일 등 33명이 돈을 모아 1947년 이 집을 사서 기증했는데 이때부터 이화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집의 구조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살던 본관, 내각을 구상하고 조각을 발표했다는 조각당, 1985년 이화장의 효과적인 보존관리와 유족들의 생활을 위해 지은 생활관이 있다. 이외에 1988년 8월 15일 건국 40년을 기념하여 국내외 동포들의 모금으로 건립된 이승만 동상이 있다. 본관은 1988년부터 역사자료 및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평소 사용하던 가구 및 유품을 전시해 개방하고 있다.(출처 : 다음 백과)

 

이화장 내부는 통제되어 둘러보지 못하고..

 

1988년 8월 15일 건국 40년을 기념하여 국내외동포들의 모금으로 건립된 이승만 동상..

 

2010년 9월에는 KBS2 1박 2일에서 이승기가 이화 벽화마을을 방문하여 날개 벽화 앞에서 방송을 촬영하였다. 그 이후 관광객들 사이에서 하얀 천사 날개 벽화가 인기를 끌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자 결국 벽화를 그린 사람이 직접 벽화를 철거하였다. 그러다가 2013년 예술가들은 다시 협업하여, 100개가 넘는 작업물을 가져와 60개 전시물을 벽화마을에 추가하였으며 이때 날개 벽화도 대학생 자원봉사자에 의하여 2013년 다른 위치에 새롭게 그려졌다.

 

2013년 새로 그려진 날개 벽화..

 

2016년에는 대한민국의 다양한 현지 문화를 체험하는 관광 경향이 높아짐에 따라 중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검색한 장소 5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화 벽화마을의 방문객들은 사생활 침해를 포함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으며, 과도관광을 견디지 못한 주민들은 2016년 4월, 일부 벽화를 철거하였다. 그중 2013년에 보수공사를 진행한 꽃 계단과 물고기 계단은 이화 벽화마을에서 가장 유명하였으나, 회색 페인트로 덧칠되었다.

 

예전에 잉어 그림이 있었는데 소음문제로 지운 곳..

 

요즘 부동산 문제가 핫뉴스인데 집을 머리에 이고 있는 저분은 얼마나 힘들까..

 

이화동은 인접한 충신동, 창신동과 함께 반세기 전부터 동대문시장의 생산 기지였다. 동대문시장에서 판매되는 의류, 침구류, 신발, 수예, 커튼, 액세서리 등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지금도 부부 또는 직원 서너 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봉제업체가 이화동 곳곳에 산재해 있다. 2006년 이화동 일대에서 진행된 ‘낙산 공공미술 프로젝트’도 봉제 노동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이 다리 안에 미싱을 돌리는 벽화와 이한열이 피 흘리는 판화같은 그림이 있습니다..

 

이화 벽화마을에서 가장 눈여겨볼 작품으로 굴다리 한쪽 벽면에 그려져 있는

작업복을 입은 여성이 미싱으로 박음질하는 모습을 표현한 대형 벽화..

 

미싱 박음질하는 그림 반대편에 있는 이한열 열사의 판화 같은 그림도 보이고..

 

미용실이 동네 주부들의 사랑방이고 소문의 진원지라서 조용히 하라고 하는 것 같네요..

 

가게의 창가로 북악산이 보이는 최고의 조망을 가진 가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곽길을 따라 창신동에 있는 채석장을 찾아갑니다..아 갑니다..

 

양 도성 성곽은 남산으로 이어집니다..

 

채석장의 일부로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이곳의 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채석장 전망대를 들러본 후 단종비가 영월을 보면서 단종의 명복을 빌어주던 동망정으로 이동합니다..

 

동망정 가는 길에 있는 손바닥 바위..

 

단종비가 영월을 보면서 단종의 명복을 빌어주던 곳인 동망정입니다..

【동망정】

동묘역에서 약 10여 분 거리에 위치해 있는 자연 친화적인 도시근린공원으로 동망산에 자리하고 있어 동망산 공원이라고도 불리는 ‘숭인근린공원’에 동망정이 있다. 동망정은 조선 6대 왕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강원도 영월에 귀양 가서 죽임을 당하자 그의 비 정순 왕후 송 씨가 궁궐에서 쫓겨나 현재 청룡사 자리인 정업원에서 시녀와 같이 지내면서 단종이 유배된 쪽으로 매일 동쪽(영월 쪽)을 바라볼 수 있는 이곳에 올라와 망왕의 명복을 빌었다 하여 동망봉이라 부르게 된 유래에 따라 이곳에 팔각 정자를 건립하여 동망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동망각..

 

종비의 일대기가 적혀있네요..

 

채석장이 담벼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동망정을 둘러본 후 오늘의 날머리인 흥인지문으로 이동하였다..

오늘 트레킹의 날머리인 흥인지문입니다..

【흥인지문】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 대한민국 보물 제1호이며, 속칭 '동대문'이라 부른다. 본래 ‘흥인문’이었으나 풍수지리상 한양의 동쪽이 비어있다 하여 ‘지’ 자를 넣어 무게감을 실어 주었다고 한다. 1996년 일제강점기 문화재 재평가작업을 통해 ‘흥인지문’이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초부터 창건하기 시작해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다. 지대가 낮아 땅을 돋운 후 건설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보다도 오래 걸렸다고 한다. 축조 당시 성문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흥인(興仁)’이란 어진 마음을 북 돋운다는 뜻으로, 유교사상의 덕목인 ‘인(仁)’을 의미한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흥인문이 크게 손상되어 정비할 때에, 풍수지리상 한양의 동쪽이 비어있다고 하여 ‘지(之)’자를 넣어 무게감을 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등 현판이 세 글자인 다른 도성의 사대문과 달리 네 글자 현판을 달게 되었다.

 

완성된 지 50여 년이 지난 1451년(문종 1)과 1453년(단종 1)에 일부 보수작업이 진행되었고,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1868년(고종 5)에 1년 동안 전면적인 개수 공사를 진행해 1869(고종 6)에 완공되었다. 한편, 일본이 1934년에 본래의 이름인 흥인지문이 아닌, 동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하면서 동대문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흥인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출처 : 다음 백과)

 

성곽길을 걸어오는 관광객들..

 

흥인지문에서 봉 채석장 위, 아래로 연립주택들이 보입니다..

 

흥인지문공원은 가을 정취가 물씬 풍깁니다..

 

곽이 잘 정비되어 있네요..

 

 

한강도성박물관도

 

성곽길을 걸으면서 보았던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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