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20.10.16) 한양도성 흥인지문 구간 ~ 남산 구간 일부를 걸은 후 이번에는 남산 ~ 숭례문(남대문) 구간을 걸었다.
남산구간은 지난주 걸었던 광희문에서 이어져서 서울 신라호텔, 국립극장, N서울타워를 거쳐, 안중근 의사 기념관, 백범광장을 거쳐 서울 힐튼호텔, 숭례문까지 이르는 구간이다. 지난주 남산 구간 일부를 걸었기에 이번에는 장충단공원에서 출발하여 N서울타워를 거쳐, 안중근 의사 기념관, 백범광장을 지나 숭례문으로 걸었다.
장충단공원에서 시작합니다..
【장충단공원】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있는 공원.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 열사들을 제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00년 11월 대한민국 고종이 설치한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기원으로 하며, 일제에 의해 1919년 공원이 되었다. 1900년 고종이 을미사변으로 순사한 내부대신 이경직과 연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호위 장졸들의 위패를 모신 장충단을 세워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해 폐사되었다. 이후 민족정신 말살 정책에 따라 장충단공원으로 격하되었다. 6.25 전쟁으로 장충단 사전과 부속건물은 완전히 소실되고, 장충단비가 남아 있다. 1984년 9월 22일, 건설부 고시 제374호 근린공원이 되어 현재는 남산공원의 일부로 흡수·합병되었다. 장충단 공원은 광장·놀이터·분수대 등의 공원시설과 석호정·장충단 비석·이준 열사 동상·사명대사 동상 등이 있다.(출처 : 다음 백과)
수표교..
【수표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이다. 길이 27.5m, 너비 7.5m, 높이 4m인 수표교는 1406년 인공으로 만든 청계천 위에 가설된 다리 중 하나이다. 청계천에 수표교가 처음 세워진 것은 1441년인데, 이때는 나무로 된 것이었고 현존하는 것은 후대에 보수한 것이다. 다리의 기둥은 2단으로 쌓은 4 각형의 큰 석재로 되어 있다. 기둥 위에 긴 휘대를 걸치고 천판석을 깔아 다리의 바닥을 만들었으며, 천판석 사이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지주석을 세웠다. 지주석 중간에는 6 각형으로 깎아 난간석을 끼웠고, 난간석 중앙에는 받침돌을 놓아 견고하게 받치도록 했다. 이 다리는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 공원 입구로 옮겨졌다. 물속에 있던 수표석(보물 제838호)은 현재 세종대왕 기념관에서 보존하고 있다.
장충정..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분사한 이준열사 동상..
【이준열사】
1907년 광무황제(고종)로부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밀명을 받고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도착하여 황제의 친서를 전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일제의 한국 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공개하여 세계 언론에 여론을 환기시켰다. 그러나 각국의 언론들이 협조적인 데 비해 열강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이에 분개한 열사는 연일 통탄하다가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인공폭포에서 물줄기가 더위를 식혀줍니다..
장충단공원에 있는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렸네요..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비..
【최현배(崔鉉培)】
울산 출신 한글학자로 1910년 한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김두봉의 권유로 조선어 강습원에 다니며 주시경으로부터 사사하였다. 1922~25년 교토대학[京都大學]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후, 1926년 연희전문학교 조교수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국어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또한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과 더불어 석방된 후 그해 9월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임명되어 3년간 재직했다. 이때 국어 교재의 편찬과 교원 양성에 주력하는 한편,〈큰사전〉을 편찬하는 등 조선어학회의 재건에 몰두했다. 이후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한글학회의 중추로서 한글전용·국어순화 등 실용적인 어문 활동에 힘써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외솔 최현배 선생의 묘비석이 경기도 남양주에서 울산으로 옮겨져 25일 울산 중구 동동에 있는 선생의 생가터에 세워졌다. (출처 :다음 백과)
활터인 석호정..
남산의 성곽은 여기로 이어집니다..
전망대에서 본모습..
연립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조선시대 선달들이 거주했던 남산자락의 초가집이 연상되네요..
성벽의담쟁이덩굴도 붉게 물들어 가고..
성곽 전망대에서 본모습..
성곽의 담쟁이덩굴..
잠실 롯데타워가 우뚝 서 있고..
단풍 너머 남산타워가..
단풍이 예쁘게 물들어 가고..
성곽을 따라 구절초가 한창이더군요..
구절초와 남산타워가 멋지게 어우러지고..
억새와 구절초..
앞쪽에서 성곽은 끊어지고/ 뒤쪽은 다시 성곽이 이어집니다....
성곽 사이에 뿌리를 내린 나무..
남산 전망대에서 본모습으로 안산, 인왕산, 북악산과 뒤쪽에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이 이어지고/
북악산 앞쪽에 청와대도 보입니다..
【남산】
산의 높이는 262m이며, 목멱산·인경산·마뫼로도 불렸다.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 북쪽의 북악산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조선 태조 때 능선을 따라 도성을 축성했으나 현재는 성곽의 일부만 남아 있다. 남산타워라고도 하는 N서울타워는 산정에 솟아 있는 높이 236.7m의 송신탑으로 사방으로 펼쳐진 서울의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휴식·관광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총면적 2,971㎢의 남산 일대가 시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90년부터 서울특별시의 ‘남산 제모습 찾기 종합계획’이 추진되면서 남산의 옛 모습 복원을 통해 남산의 역사적 위상과 자연경관을 회복하는 동시에 시민 휴식 공간으로써의 기능을 하고 있다. 남산의 명소는 N서울타워·팔각정·장충단공원·남산 케이블카·야생화원 등 다양하다.(출처 : 다음 백과)
남산타워와 팔각정..
단풍 아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시민들..
서울의 중심점입니다..
봉수대..
남산도서관 방향에서 사람들이 올라오고..
좌로부터 안산, 인왕산, 북악산이..
서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가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에 세워졌으며..
위안부 피해를 처음 알린 김학순 할머니가 한국, 중국, 필리핀 소녀들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모습..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인 2019년 8월 14일 샌프란시스코 교민 등의 모금으로 제작된 기림비를 김진덕·정경식 재단으로부터 기증받아 남산 회현자락 옛 조선신궁터 부근에 설치했다. 이 비와 똑같은 모습의 기림비가 2017년 샌프란시스코에 건립되어 있으며, 김학순 할머니가 한국, 중국, 필리핀 3국의 소녀가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는 모습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억과 평화, 인권, 정의를 지키기 위해 연대하자는 의미라고 한다. 이 기림비의 이름을 공모한 결과 '정의를 위한 연대(Unity for Justice)가 최종 선정되었다.
QR코드를 찍어 보내면 선물을 준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와 김구 선생의 동상도 있고,,
【안중근 의사】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처단한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순흥, 자는 응칠, 세례명은 토마스로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1906년부터 계몽운동을 벌였다. 1907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9년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해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가 회담을 마친 뒤 환영 군중 쪽으로 갈 때 권총 3발을 쏘아 사살했고, '대한만세'를 외친 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사형을 언도받아 1910년 여순 감옥(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출처 : 디음 백과)
【김구 주석】
일제강점기 나라의 독립과 통일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투쟁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던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 자는 연상, 호는 연하 또는 백범으로 1919년 상해로 망명하기 전까지 국내에서 동학농민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을 거쳐 국무위원과 주석을 지냈다. 이후 여러 갈래로 갈라진 민족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고자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하고 좌우합작의 이념적 통합을 이루었다. 해방 이후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그는 반탁운동을 맹렬히 전개했고 완전자주독립노선을 주장했으나,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저서로는 <백범일지>가 있다. (출처 : 디음 백과)
가을이 무르익어가고..
임진왜란 때 반출됐다 400여 년 만에 돌아온 후계목인 남산 와룡매..
【남산 와룡매】
와룡매는 ‘용이 누워서 기어가는 것처럼 가지가 뻗어 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남산 와룡매는 역사 속의 설움과 한을 간직한 채 은은한 향기를 내뿜으며 지난 1999년부터 남산 중앙분수대 좌, 우를 지키고 있다.
남산 와룡매는 원래 임진왜란 당시 창덕궁에 자라고 있던 나무를 일본으로 가져간 모목(母木, 어미나무)의 후계목으로, 일본이 한국 침략에 대한 사죄의 뜻을 담아 400여 년 만에 환국한 나무다. 임진왜란 당시(1592~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따라 조선으로 출병한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미야기현 센다이 맹주)에 의해 1593년 일본으로 반출됐었다.
이후 1609년 다테家의 보리사(菩提寺)인 마츠시마(松島)의 즈이간지(瑞巖寺)가 중건될 당시 본당 앞 양 옆에 홍백으로 심어져 400여 년간 화려한 꽃을 피우며 사찰의 유명한 나무(名木)가 되었다. 그러던 중 이 사찰의 129대 주지로 부임한 히라노 소죠(平野宗淨) 스님이 1990년대에 일본의 무의미한 침략으로 인해 조선에 많은 피해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데 대한 참회로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 후계목 반환을 제의했다. 양 정부 간 협의 끝에 남산 와룡매는 1999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 89주기를 맞아 400여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부는 '환국식'을 개최했고 이곳 남산공원에 홍매화 1그루, 백매화 1그루를 각각 심어 놓았다. (출처 : 아시아 경제신문/2013.04.23)
새로 복원한 성곽..
대한민국 정부 초대 부통령이었던 성재 이시영 선생..
성곽길 너머 남산타워가 보이고..
가을이 익어 갑니다..
남산공원 1 지점에서 성곽이 끊어지고 / 도로를 건너 다시 이어집니다..
국보 1호인 숭례문
【숭례문】
조선시대 서울 성곽의 정문이며 1398년에 완성되어 1448년에 개축되었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1962년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로 숭례문이라 하였다. 1934년 일본이 ‘남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 ‘숭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누각형 2층 건물로 석축 중앙에 무지개 모양의 문이 세워져 있고,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다포 양식의 공포를 얹은 위층은 외삼출목, 아래층은 외이출목으로 구성되어 조선 초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008년 2월 10일 방화 화재로 석축만 남긴 채 누각 2층 지붕이 붕괴되고 1층 지붕도 일부 소실되었다. 5년여에 걸친 복원 공사 끝에 2013년 5월 4일 준공·공개되었다. (출처 : 다음 백과)
숭례문의 모습들..
남대문 시장에서 갈치구이로 뒤풀이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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