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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영남)

태종무열왕릉과 진흥왕릉 등이 있는 서악동 고분군

by 산사랑 1 2021.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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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여행 셋째 날은 이른 아침 숙소인 '여여당' 뒤쪽에 있는 태종 무열왕릉과 진흥왕릉이 있는 서악동 고분군을 찾았다. 왕릉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는데 무열왕릉 비석을 둘러보고 왕릉을 구경하는데 해가 떠 올라 운 좋게 왕릉 위로 떠 오르는 일출을 볼 수 있었다.

 

태종 무열왕릉..

【태종 무열왕릉】

경주 무열왕릉은 신라 제29대 태종(太宗) 무열왕(재위 654∼661, 김춘추)의 능이다. 경주 북서쪽에 있는 선도산(仙桃山)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김춘추는 신라 중대(中代)의 첫 진골(眞骨) 출신 왕으로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능은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비교적 큰 편이며 능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으나 지금은 흙 속에 묻혀 있다. 동쪽에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이 남아있는데,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이 쓴 '태종 무열대왕 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 되어 있어 이곳이 무열왕의 능임을 알 수 있다.(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왕릉 위로 떠 오르는 일출을 보는 행운을 누리고..

서악동 고분군에도 단풍이 곱게 들었습니다..

서악동 고분군으로 위쪽부터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문흥왕으로 추정된다..

서악동 고분군

경주 서악동 고분군(慶州 西岳洞 古墳群)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통일신라의 고분군으로 무열왕릉 바로 뒤편의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고분을 가리키며, 1964년 8월 2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의 고분들은 경주 분지의 대형 고분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 봉토고분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 시설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으로 보아 안에는 나무로 된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형식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들 고분이 분포한 지형은 선도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뒷산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 사상의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경주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경주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경주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조선 순조 때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그의 추사집에서 『진흥왕릉고(眞興王陵攷)』라는 글을 통해서 이들을 법흥왕릉, 진흥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등으로 추정하였다. (출처 : 위키백과를 중심으로 재작성)

 

아래쪽에서 본 서악동 고분군..

아래쪽에서부터 3개의 왕릉..

반대편에서 본모습..

2014 ~ 2019년까지 고분군 주변 & 연못 정비를 했다고 합니다..

연못에 담긴 산이 '치외법권 지역'인 소도로 죄인도 이곳으로 도망치면 잡을 수 없는 신성시되는 곳입니다..

국보 25호인 태종 무열왕릉비로 비록 몸통은 없어졌지만 6마리 용이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이수나

받침대인 귀부는 정교한 조각으로서 잘 보존된 편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에 국보 제25호로 지정되었다.

【태종 무열왕릉 비】

경주 태종 무열왕릉 비(慶州 太宗武烈王陵碑)는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무열왕릉에 있는 신라 중기(7세기)에 건립된 신라 태종 무열왕의 능비(陵碑)이다. 무열왕릉비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5호로 지정되었다.

 

비의 아래에는 귀부를 놓고 위에는 이수를 얹은 형식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 비의 조각수법은 독창적이다. 귀부의 머리는 거북 모양으로 목은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고 있어 전체는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과감한 기상을 보여주면서도 표정은 과격하지 않고 오히려 명랑하다. 비좌(碑座)는 연꽃으로 이루어져 있고 귀갑은 4중의 육각형 귀갑문이 조각적인 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이수는 좌우 3마리씩 놓여 있는 용이 서로 상대방의 앞발을 꼬리로 꼬아 전체는 좌우대칭형을 이루고 있는데, 다리의 표현, 용의 비늘 하나하나가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귀부와 이수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은 각자 생기가 있으면서도 전체와 조화되어 있으며 완전한 짜임새를 보여준다.

 

귀부(龜趺)의 길이 약 3.33미터, 폭 2.54미터, 이수(螭首)의 높이 약 1.1미터이다. 비신(碑身)은 현재 없고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는데 화강석으로 되었으며, 귀부는 장방형의 기석(基石) 위에 얹혀 있다. 이수는 6룡(龍)이 서로 능을 향해 구부리고 있는 모습으로 윤곽을 이루는데, 웅장한 구 자세는 당시 석조 예술의 뛰어난 솜씨를 잘 보여준다. 이수 중앙에는 김인문(金仁問)의 글씨로 전하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전서(篆書)로 양각되어 있다.(출처 :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을 중심으로 재작성)

 

해가 떠오릅니다..

왕릉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려고 했는데 오늘 드디어 보게 됩니다..

 

* 며칠간 통영여행으로 불방을 비우게 됨을 혜량하여 주시기 바라며 귀경 후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