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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영남)

경주향교, 계림, 최부자댁(21.11.05) 탐방

by 산사랑 1 202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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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 3일 차 일정으로 아침식사후 정들었던 숙소인 '여여당'에서 나와 경주향교와 계림, 최부자댁을 들렀다. 

민초들을 구휼했던 만석꾼으로만 알던 최부자댁이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경주향교..

경주향교로 가면서 본 모습으로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물들 때면 엄청 예쁠 것 같더군요..

경주향교 들어가는 길..

경주향교는 국학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고려시대 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경주향교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고려시대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신라 신문왕 2년(682) 국학(國學)이 설치되었던 곳이라 한다. 그 뒤 1492년(성종 23) 경주부윤 최응현(崔應賢)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대성전이 소실되어 위패를 도덕산(道德山) 두덕암(斗德庵)으로 옮겼다가 1600년(선조 33) 경주 부윤 이시발(李時發)이 대성전과 전사청을 중건하고 위패를 환안(還安)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부윤 이안눌(李安訥)이 명륜당을 중수하고 동서 양무(兩廡)를 중건하였으며, 1668년(현종 9)에 보수하였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무·서무·전사청·내신문(內神門)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경주향교로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천년이 남은 우물..

 경주향교 우물

경주향교 우물은 경주향교 전사청과 관리사 사이에 있으며, 이 우물은 향교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쪽 지름이 80센티, 깊이 5.8미터가량으로 신라시대 우물 가운데 분황사 우물에 버금가는 큰 규모이다. 다듬은 돌을 둥글게 쌓아 올린 위에 네모난 화강석을 맞대어 덮개돌을 올린 위에 네모난 화강석을 맞대어 덮개돌을 놓았고 사방으로 배수구를 두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은 요석궁이 바로 이곳이며, 이 우물은 요석궁의 우물로서 여기에서 태어난 설총이 이 우물물을 마시고 대학자가 되었다 해 총명수라고 부른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출처 : 울산종합일보)

 

협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왼쪽의 대성전 건물(보물 1727호)..

경주향교 대성전

대성전 앞면의 계단석은 안압지(雁鴨池)에서 옮겨왔다고 하는데, 명륜당 기단 등에서 발견되는 석탑 부재 등의 유구와 함께 보존 가치가 크다. 중건된 연혁이 분명하고 간결하고 위엄 있는 목조 건물로 고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00년 다시 중수되었고, 2011년 12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27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공감과 파장] 경주향교 명륜당은 2020년 12월 29일 보물 제2097호로, 대성전의 동무. 서무, 신삼문은 보물 제2098호로 지정되었고, 대성전은 2011년 12월 7일 이미 보물 제1727호로 지정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날 오전 향교 명륜당 앞에서 제9회 경주 전통 음식경연대회가 열려 잠시 구경을 할 수 있었고

계림을 다녀온 후 다시 가보니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적시에 구경할 수 있어 새벽녘 왕궁 너머 일출을 본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명륜당 앞에서 음식경연대회를 거행하여 명륜당 건물은 볼 수가 없었다..

【경주 전통음식

한국 수력원자력과 경주향교는 11.5일 경주향교 명륜당에서 '2021 신라전래․경주전통음식 경연대회'를 개최했다. 지역 고유문화자산으로 경주 향토음식을 발굴해 홍보하기 위해 열린 이번 대회는 한상차림과 요리․장(醬)류, 다과․후식류의 3개 분야로 나눠 진행했다.

 

올해는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35개 작품이 출품됐다. 이인숙 위덕대 조리학과 교수 등 심사위원의 심사결과 박월자 스님의 '사찰음식 5첩 코스요리'가 대상(경북도지사상)을 수상했다. 금상 3명에는 유미숙 씨의 '꿩장'(한수원사장상), 안경애씨의 '5첩 반상'(경주시장상), 우명희씨의 '석탄병'(경주시의장상)이 선정됐다. 은상은 박명순 씨의 ‘꿩으로 만든 치유 밥상’, 이숙희 씨의 ‘가자미식해’, 정경희 씨의 ‘신라인의 예와 풍류’가 각각 뽑혔다. 동상은 백정분 씨의 ‘계절 밥상‘, 손혜주 씨의 ‘꼬막 품은 노란 장미’, 신숙희 씨의 ‘전통주와 주안상’이 각각 수상했다.(출처 : 영남일보)

 

대상을 수상한 박월자 스님의 '사찰음식 5첩 코스요리'로 한참 진열을 하고 있는 모습..

금상 3개 작품 중의 하나 인 유미숙씨의 '꿩장'

은상 3개의 작품 중의 하나인 박명순 씨의 ‘꿩으로 만든 치유 밥상’

은상 작품인 이숙희 씨의 ‘가자미식해’

동상 3개의 작품 중 하나인 손혜주 씨의 ‘꼬막 품은 노란 장미’,

기타 출품작들로 농부의 밥상, 시골밥상 등..

경주 향교 구경을 마치고 바로 옆에 있는 계림으로 향했다.

계림 가기 전에 있는 사적 188호인 내물왕릉

내물왕 뒤에 있는 왕릉으로 능의 주인이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경주 김씨 시조인 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계림입니다..

경주 계림

이 숲은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주 김씨의 시조 알지(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사적 제19호) 신라 탈해왕(脫解王) 때 호공(瓠公)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렸다.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 하고, 본래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鷄林)으로 부르게 되었다. 계림은 신라의 國號(국호)로도 쓰이게도 되었다. 펑퍼짐한 숲에는 느티나무 등의 옛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북쪽에서 서쪽으로 작은 실개천이 돌아 흐른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박씨 왕족인 파사왕에게 왕위가 계승되어 왕이 되지 못했고, 후대 내물왕대부터 신라 김씨가 왕족이 되었다. 경내의 비는 조선 순조(純祖)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신라 왕성 가까이 있는 신성한 숲으로 신라 김씨 왕족 탄생지로 신성시되고 있으며 지금도 계림에는 왕버들과 느티나무가 하늘을 가릴 듯하다. 대릉원-계림-반월성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옆에는 봄이면 노란 유채꽃이 유적지의 운치를 더 깊게 해 준다.(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계림 정문에 있는 수령 1300여 년 된 회화나무..

계림의 멋진 소나무들..

계림의 나무들도 단풍이 들고 있네요..

나무가 기품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계림에 인접해 있는 경주 첫날밤 야경을 보기 위하여 다녀온 첨성대를 당겨봅니다..

계림을 구경한 후 최부자댁을 방문하였다..

경주 최부자댁

경주 최 씨의 종가로 신라시대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전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9대째 대대로 살고 있으며 1700년경 이 가옥을 지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건물 구성은 사랑채·안채·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대문채에는 작은 방과 큰 곳간을 마련하였다. 사랑채는 안마당 맞은편에 있었으나 별당과 함께 1970년 11월 화재로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사랑채터 뒤쪽에 있는 안채는 트인 'ㅁ'자형이나 실제로는 몸채가 'ㄷ'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고 'ㄱ'자형 사랑채와 '一'자형 중문채가 어울려 있었다. 또한 안채의 서북쪽으로 별도로 마련한 가묘(家廟)가 있는데 남쪽으로 난 반듯한 길이 인상적이다. 안채 뒤편으로 꽃밭이 있어 집 구성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대체로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경주최식씨가옥(慶州崔植氏家屋)이었으나, 경주 최씨가문이 대대로 살아왔던 집이고, 경주의 이름난 부호로 '교동 최부자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경주교동 최씨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 하였다.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최준 선생은 임시정부 시절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청구대와 대구대(영남대 전신)를 세웠다고 한다.. 

최부자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1884-1970)의 결단은 또 하나의 인생 사표(師表)이다. 자신이 못다 푼 신학문의 열망으로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세웠고 백산상회를 세워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그는 노스님에게서 받은 다음의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 "재물은 분뇨(똥거름)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출처 : 내외신문 등에서 발췌) 

 

경주박물관대학 총 동창회장인 여여당 주인의 말에 의하면 최준 선생은 백산상회를 세워 독림자금을 지원했는데 그 규모가 임시정부 일년 예산의 절반이었다고 하며, 해방 후 김구 선생이 확인을 한 결과 최준 선생이 보낸 금액과 당시 임정에 기록된 금액이 같았다고 한다. 이는 독립자금을 보낸 최준 선생도 대단하지만 그 자금을 한 푼도 다른데 쓰지 않았던 임정 재정부장도 대단한 분이었던 것 같다.

최부자댁 육훈과 작은 쌀통이야기..

경주 최부자집의 만석꾼 전통은 1600년에서 1900년 중반까지 무려 300여년 동안 12대를 내려오며 만석군의 전통을 이었고 마지막인 1950년 전 재산을 스스로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학에 기증 함으로써 스스로를 역사의 무대 위로 던지고 사라졌다. 그러면 300년을 넘게 만석군 부자로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어요.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활짝 열렸어요. ‘모든 사람들이 굶어 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졌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최부자집 가문이 지켜온 가훈은 오늘날 우리에게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1. 절대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 세파에 휘말려 집안에 화를 당할 수 있다.

2. 재산은 1년에 1만 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일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과 사회에 환원한다.

3.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냈다.

4.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서 남들이 싼값에 내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하게 해서는 안된다.

5. 가문에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 이웃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중에서) (출처 : 내외신문 등에서 발췌)

안채로 오늘 오전에 행사가 있어 이쪽 문은 걸어 잠그라고 하더군요.. 문을 잠그기 전에 잠깐 찍었습니다..

집이 참으로 정갈한 것 같더군요..

최부자댁 옆에 있는 경주 교동법주,,

최부자댁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깨끗합니다..

최부자댁 구경을 마치고 찰보리빵의 본점인 단석가에 들러 찰보리빵을 구매하였다/ 단석가 길 건너에 있는 신라대종..

 '여여당' 주인의 딸이 운영하는 경주 민속한우 직판장에 들러 전날 구매한 한우 값을 계산, 택배로 보내고 호미곶으로 이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