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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충청)

홍주성(22. 3.10)

by 산사랑 1 2022.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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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양각산, 외연도 섬 트레킹, 태안해뱐길 6~7코스 트레킹을 하기 위한 2박 3일 여정의 첫 번째 코스로

병인박해 당시 113인이 순교한 곳이자 1906년 항일의병이 일어난 역사의 현장 홍주읍성을 들렀다.    

 

홍주읍성입니다..

홍주읍성】 사적 제 231호

 

홍성 홍주읍성(洪城 洪州邑城)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에 있는 읍성이다. 1972 10 14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31호 홍주성(조양문, 아문, 산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홍성 홍주읍성으로 명칭 변경되었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와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현재의 성은 조선 문종 1년(1451년)에 수축한 것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과 동문인 조양문(朝陽門), 동헌인 안회당(安懷堂), 여하정이 남아있다. 서쪽에 경의문(景義門), 북쪽에 망화문(望華門)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소실되었다.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쌓게 되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문종 1(1451)에 새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 1.5km), 높이는 11(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1975년 복원한 것이다. 아문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며 홍주아문이란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시킨 일이 있다. 이곳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읍성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초기 새로운 형식에 의해 쌓은 성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출처 : 위키백과)

 

2012년 복원한 홍주읍성 감옥으로 병인박해 당시 113명이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홍주 순교성지

홍주(홍성군의 옛 지명)는 병인박해 당시 기록상으로 모두 212명이 순교했지만, 기록되지 않은 순교자들 또한 1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순교로 홍주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순교자들이 많은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다. '홍주성 천년여행길'홍주성천년여행길자료에 의하면, 홍주를 중심으로 내포 지역에 순교자가 많았던 이유는 홍주목을 관장하던 홍주목사와 군사 중심지 진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주순교성지는 순교자들이 처형당한 감옥과 동헌, 생매장터 등 순교지가 있어, 매년 순례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 당시, 홍주에서 순교한 원 시장 베드로와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우, 황일광 시몬 등 4명의 순교자가 '복자' 칭호를 받는 시복식이 열리기도 했다. 홍주성지에는, 순교자들이 잡혀 와 신앙을 증거 했던 동헌과 113명이 순교한 감옥터가 있다. 병인박해 당시 충청도 최초 순교자인 복자 원 시장 베드로는, 감옥터에서 얼어가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을 했다고 전한다. "저를 위해 온몸에 매를 맞고, 제 구원을 위해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이제는 제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얼고 있는 이 몸을 바칩니다." (출처 : 오마이 뉴스에서 발췌)

 

홍주읍성 감옥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의 옥사가 자리하고 있다. 마당에는 고문하는 형틀이 두 개가 놓여 있다...

홍주읍성 우물터로 당시 2곳의 우물터 중의 한 곳으로 2012년 복원..

이곳 우물터에서 충청도 최초 순교자인 원시장(베드로)를 3개월에 걸친 매질에도 죽지 않아 동사시켰다고 합니다..

홍주정과 홍화문..

2013년에 복원한 홍화문..

홍화문은 현문식 문루를 두었으며, 아래 바닥부터 나무 기둥이 올라가 누각으로 이어진다..

홍주정..

홍주읍성 축성에 사용 후 남은 사찰 부재..

홍주성 비석군..

이 비석 중에 홍주성 수성비(충남 문화재자료 제166호)는 순조 24년(1824) 황폐해진 홍주읍성을 보수하여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원래 이 비는 조양문 앞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비문에는 성의 축조과정과 성벽이 허물어진 것을 순조 23년(1823) 봄에 부임한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수리하기로 하고, 8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마쳤다. 비의 뒷면에는 성 쌓기 작업을 주도하고 감독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이 있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외의 비석은 목사, 현감, 관찰사 등의 치적을 기념하기 위한 선정비, 영세불망비, 청덕선정비 등이다.

병오항일의병기념비..

1906년 병오항일의병이 일어났을 당시 홍주성을 탈환하여 지키고 있던 의병을 공격하다 관군과 일본군 일부가 죽었다. 이때 죽은 일본군을 위하여 1907년 김윤식이 시를 짓고 이완용이 글씨를 써서 이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이곳에 ‘애도지비’를 세웠다. 해방되자 애도비를 철거하여 땅에 묻고 그 자리에 다시 ‘병오항일의병기념비’를 세웠다. 

병인박해 당시 113인의 순교지이자 항일의병이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인 홍주읍성을 의미를 새기며 걸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