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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가고 싶다/남해

목포 갓바위(22. 4. 7) & 고하도 충무공 유적지

by 산사랑 1 2022.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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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신안 섬 여행 2박 3일 마지막 날유달산 산행 후 숙소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갓바위(천년기념물 500호)를 찾았다.

갓바위는 풍화작용과 해식작용으로 만들어졌으며, 큰 것은 8m, 작은 것은 6m 정도라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삿갓을 쓴 사람 형상의 갓바위..

목포 갓바위

2009년 4월 27일에 천연기념물 제500호로 지정되었다. 목포 갓바위는 서해와 영산강이 만나는 강의 하구에 위치해 있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풍화작용과 해식작용을 받아 만들어진 풍화혈(타포니, tafoni)이다. 갓바위 일대는 저녁노을이 비치는 바다와 입암산의 절벽에 반사되는 노을빛이 아름다워 일찍이 입암반조(笠岩返照)라 하였다.

 

한 쌍으로 이루어진 갓바위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에 병든 아버지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한 아들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양지바른 곳에 모시려다 실수로 관을 바닷속을 빠뜨리고 말았다. 불효를 저질러 하늘을 바라볼 수 없다며 갓을 쓰고 자리를 지키던 아들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훗날 이곳에 두 개의 바위가 솟아올라 큰 바위는 ‘아버지 바위’, 작은 바위는 ‘아들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갓바위는 바위의 모양이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삿갓을 쓴 사람의 모양이라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삿갓바위로도 불린다.

 

다른 하나는 진리를 깨달은 경지 높은 도사 스님이 영산강을 건너 나불도에 있는 닭섬으로 건너가려고 잠시 쉬던 자리에 쓰고 있던 삿갓과 지팡이를 놓은 것이 갓바위(중바위/스님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월출산에서 도를 닦던 도사 스님이 상좌 스님을 데리고 목포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려고 축지법을 사용해서 영산강을 건너려다 상좌 중이 잘못 따라와서 건너지 못하고 돌로 굳어졌다는 얘기도 전해 내려온다. 갓바위는 두 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기는 큰 것이 8m이고 작은 것이 6m 정도이다. 목포 8경의 하나이며, 2008년 4월에 영산강변을 따라 해상 보행교가 설치되어 있어 바다 위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보행교는 298m 구간에 설치되어 있으며, 밀물 때 약 1m 정도 올라왔다가 썰물 때에는 바닷물을 따라 내려간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중심으로 재작성)

 

2일간 머물렀던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숙영관..

갓바위 공원에는 개량 동백이 활짝 피어 있고..

갓바위 조형물..

입암산 둘레길도 잘 조성되어 있고..

공원 입구도 잘 가꾸어 놓았고..

풍화와 침식 작용으로 곳곳에 구멍이 뚫린 바위가 여러 형상을 보여줍니다..

아기코끼리 형상..

마치 맘모스 형상 같은 느낌이 들고..

서서히 갓바위 형상이 나타나고..

목포 갓바위에서는 인기가수 이선희, 이승기와 방송인 이금희가 출연한 ‘한 번쯤 멈출 수밖에' 촬영을 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조금씩 변하는 것도 재미있다..

도화 꽃도 피어 있고..

갓바위를 본 후 고하도에 있는 충무공 유적지를 찾아가는 길에 본 살구나무 꽃..

전라남도 기념물 10호인 고하도 충무공 유적지..

전남 목포에 위치한 고하도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명량대첩에서 승리한 후 106일간 주둔하며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력을 재정비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은 고하도를 핵심 전략기지로 삼아 호남의 곡창지대를 수호하며 왜적의 침입을 막아냈다. 충무공은 107일간을 고하도에 머물며 53척의 배를 건조하고 수군을 2천 명으로 늘리는 등 수군 재건의 토대를 마련하여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왜란을 끝내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기념하여 고하도에 충무공을 추모하는 모충각과 이충무공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목포시는 매년 4월 28일 이곳에서 충무공 탄신제를 열고 충무공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고하도 모충각..

충무공 5대손이 완성한 충무공 기념비..

충무공 기념비

이충무공 기념비는 1597년 이순신이 고하도에 진성을 축성하고 군사를 주둔했던 터에 세운 것으로 훗날 삼도 수군통제사 오중주가 건립공사를 시작하여 1722년(경종 2) 8월 충무공의 5대손인 삼도 수군통제사 이봉상이 완성했다. 비명은 ‘유명 조선국 고 삼도통제사 증 좌의정 충무 이공 고하도 유허 기사비’이다. 남구만이 비문을 지었고, 조태구가 글씨를 썼으며, 이광좌가 비문을 새겼다.

 

비문은 17행 48자이며,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군사 주둔처로 고하도를 선정하게 된 과정, 수군 진영이 1647년에 당곶진(현재의 목포시 이로동 하당 일대)으로 옮겨가게 되어 이곳 고하도 진영을 폐하게 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오중주가 유허비 건립을 주도한 내용, 전쟁 발발 시 군량미 비축 및 공급의 중요성, 후임 수군통제사들에게 이곳이 고하도 진영 터임을 알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게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뒷면에는 ‘숭정 기원후 구십 오년 임인 팔월’로 건립연대가 새겨 있다.

 

비석의 높이는 227센티미터이고 재질은 화강암이다. 당초문이 새겨진 네모꼴의 머릿돌과 좌대를 갖추었다.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 야산에 버려져 있었던 것을 광복 후에 수습하여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 비각은 1949년에 건립했고 1963년에 중수했다. 기념비를 보호하는 비각 모충각 내에는 40여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충무공 기념비는 1974년 9월 24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임진왜란의 흔적)

 

 

다음은 고하도 용오름길 트레킹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