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분당우리교회에서 '09. 2.22일 "하나님의 백성, 그대는 정녕 용서의 사람인가?"란 제목으로 설교하신 김지찬 교수님(총신대 신학대학원)의 설교내용 중 일부를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진정한 용서의 의미】
김수한 추기경님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라”는 매우 뜻 깊은 유언을 남겼다. 진정한 용서가 과연 무엇일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신애(전도연)는 아이가 유괴, 살해된 후 기독교를 접한 후 용서가 기독교의 핵심이란 것을 깨닫고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면회를 갔으며, 거기서 신애가 살인범을 용서하지 않았는데도 살인범이 자기도 믿음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었다는 말을 듣게 된 후 배신감을 가지고 기독교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여기서 살펴볼 점은 충분한 준비 없이 용서를 시도하려는 신애의 경우 안쓰러워 보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용서를 말한 살인범은 가증스러워 보인다. 그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진정한 용서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애의 경우를 보면 용서하겠다는 결단을 하고 살인범을 찾아 갔지만 막상 용서하고자 할 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정한 용서는 과연 무엇일까?
세 번 결혼과 세 번 이혼을 한 슬픔을 가지고 있는 공지영씨의 체험에서 용서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공지영씨의 두 번째 산문집「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에서 두 번째 남편이 작고했을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진솔한 심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가 죽는다는데 어쩌면 그가 나를 모욕하고 그가 나를 버리고 가버렸던 날들만 떠오르다니. 저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리고 그의 죽음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 진실이었습니다. 죽음조차도 우리를 쉬운 용서의 길로 이끌지는 않는다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인간의 기억이란 이토록 끈질기며 이기적이란 것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다만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직 다 용서할 수 없다 해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다행입니다. 우리 생애 한 번이라도 진정한 용서를 이룰 수 있다면, 그 힘겨운 피안에 다다를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이별로 향하는 길이라 해도 걸어가고 싶습니다.』
이와 같이 용서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음이 오그라들었기 때문이랍니다.
불교의 달마대사는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하나 꽂을 자리가 없다네...”
마음이 옹졸해 진 까닭은 친밀했던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며 그 상처는 공지영씨의 고백처럼 죽음 앞에서도 쉽게 용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상처 치유에는 “복수가 꿀처럼 달콤”하기 때문에 단기간으로 볼때 용서보다 복수하는 것이 가장 쉬울 것 인지 모른다. 이것이 삶의 현실이고 인간의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용서를 해야 할까? 그리고 용서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용서와 사랑을 평생 연구한 미국 풀러신학교의 윤리학 교수인 “루이 스미스”의 고백『한 경찰관이 막내아들을 이유 없이 학대하여 분노하였으나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비참해 진다는 것을 깨닫고 용서를 하기로 하였으며, 1년후 어느날 그 경찰관을 우연히 보고 다시 분노가 치솟아 또 용서가 필요했으며, 다시 몇년후 그 경찰관이 죄를 짓고 해임되었다는 소식을 듣었을 때 그 소식이 꿀보다 달콤했으며 그 때 다시 한 번 그를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용서했으며, 완전히 용서하기까지 얼마나 더 용서해야할 지 알 지 못했다.』이와 같이 용서는 한 번의 결단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정서까지 바꾸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 인생에서 가장 긴 길이며, 가슴을 변화시키는 용서를 해야 진정한 용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용서해야할 사람에 대한 분노, 두려움, 적개심의 정서 옆에 그를 이해하고 긍휼을 베풀고 사랑을 보이는 긍정적 정서를 병치시켜 긍정적 정서로 부정적 정서를 대치시키는 과정을 거처야 되며 이러한 과정을 오랜 기간 동안 강하게 지속시키면 용서가 될 수 있으며 이를 정서적 용서라 하며 비로소 몸이 따르게 된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용서는 여기까지 인 것 같다.
진정한 용서는 신의 영역과 같다고 고백한 김근태씨의 말을 빌려보면『그를 고문한 이근안씨가 찾아와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할 때 언론 보도에서는 김근태씨가 이근안씨에 대하여 용서를 하였다고 하였으나 김근태씨는 고맙다고는 했지 용서했다고 하지는 않았다고 후에 밝혔다.』사실 김근태씨도 마음속으로 용서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나 이근안씨를 보는 순간 지난날 고통 받았던 상처 때문에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중형을 받을까봐 시효가 지난 후 비로소 자수했던 이근안씨에 대한 의구심으로과연 저 사과가 진실일까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있었다.
용서는 단순하지도 않으며 결코 값싸지도 않고 고통없는 여정이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빚 진자의 심정”이 아니고는 어렵다. 용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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