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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남미 아르헨티나

신의 걸작품인 세계 최대의 이과수 폭포 1 : 악마의 목구멍 등 아르헨티나 폭포

by 산사랑 1 2017.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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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걸작인 이과수 폭포의 웅장한 모습(클릭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이과수 폭포】

이과수 폭포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국경지역, 파라나 강과의 합류점에서 상류 쪽으로 23㎞ 지점에 있다. 편자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82m이고, 너비는 북아메리카에 있는 나이애가라 폭포의 4배인 4㎞이다. 낙차지점에 있는 절벽 가장자리의 숲으로 뒤덮인 많은 바위섬들로 인해 높이 60~82m 정도 되는 275개의 크고 작은 폭포들로 형성되어 있다. 강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폭포의 이름도 '거대한 물'을 의미하는 과라니어에서 유래했다. 유출량은 11~3월에 해당하는 우기 동안 최대 1만 2,750㎥/s까지 증가한다. 가장 적을 때는 8~10월의 건기 동안이며, 연평균유출량은 약 1,756㎥/s이다.


이과수 폭포는 이과수 강이 서쪽으로 굽이치며, 파라나 고원의 가장자리를 흐르다가 협곡으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에서 생긴다. 폭포와 관련된 섬 가운데 폭포 바로 위에 있는 산마르틴 섬과 그란데 섬이 가장 유명하다. 그란데 섬을 중심으로 2개의 지류로 갈라진 이과수 강이 다시 합류해 현무암 및 용암층을 지나 가르간타델디아블루('악마의 목구멍')로 불리는 깊은 틈으로 낙하하며, 그 모습은 '심연으로 뛰어드는 대양'이라는 말로 묘사된다. 이과수 강은 협곡을 지나 계속 흐르다가 파라나 강과 합류한다. 각각의 많은 폭포 줄기들은 돌출한 암붕으로 인해 중간에서 부서진다. 이때 생기는 물보라와 물의 굴절로 인해 생긴 무지개가 장관을 이룬다. 한 층의 안개가 폭포의 아래 지점에서부터 위로 150m되는 곳까지 드리워져 웅장하고 수려한 경관에 한몫을 한다.


아르헨티나 영토에 속한 이과수 강 절반 지역에 있는 산마르틴 섬에서 아르헨티나 영토에 해당하는 폭포의 장관을 구경할 수 있다. 이곳에서 산마르틴·보세티·도스에르마나스('두 자매')·미트레·트레스모스케테로스('삼총사') 폭포 등을 볼 수 있다. 폭포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아르헨티나 쪽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거나 폭포 안쪽을 오를 수 있다. 브라질에서는 폭포 전체를 볼 수 있다. 브라질 쪽에 있는 폭포들로는 벤자민콘스탄트·데오도루·플로리아누 등이 있다.


폭포를 방문한 최초의 스페인의 탐험가는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이다. 1541년 그는 폭포를 '살토데산타마리아'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곧 이과수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폭포의 지형도는 1892년에야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1897년 브라질의 장교 에드문두 데 바루스는 미국에 있는 옐로스톤 국립공원에 필적할 만한 국립공원을 이과수 폭포에 세울 것을 구상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의 국경이 조정된 후에 각 나라에 별도의 국립공원이 세워졌다. 두 공원 모두 폭포와 관련된 식물, 야생동물, 아름다운 풍경 등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공원에서 사냥은 금지되어 있으나 낚시는 허용된다. 아르헨티나 쪽의 공원에는 자연사박물관이 있다. 반낙엽성 식물에서 열대식물에 이르기까지 풍부하고 다양한 식물이 분포하고 있어서 식물학적으로 관심이 집중되어왔다.


사실 1800년대 중반만 해도 이과수는 파라과이 땅이었으며 이 당시 파라과이는 잘나갔다. 파라과이는 브라질이 우루과이를 자신 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을 저지하려다가 브라질과 전쟁을 하게 되고 당시 파라과이 병력은 6만이고 브라질은 3천 정도였기에 쉽게 이길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것이 오산이었다. 전쟁의 양상은 당시 파라과이와 분쟁관계에 있던 아르헨티나가 개입하여 파라과이 대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삼국동맹으로 확대되었다. 땅덩어리가 크고 인구가 많은 국가와의 전쟁에서 이기기가 쉽지 않아 파라과이는 시간이 갈수록 수세에 몰려 결국 전쟁에 패하게 되었다. 전쟁에 패했을 때 항복을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끝까지 저항한 것이 국가를 완전히 작살나게 만들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가 파라과이에 들어와 파라과이 국민 절반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되었고, 특히 남자는 90%가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과수도 브라질, 아르헨티나에게 거의 다 빼앗기게 되었다.

(출처 : 다음 백과사전을 중심으로 재편집)


이과수 폭포에 무지개가 걸려 있는 장쾌한 모습(클릭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남미 38일차 : 아르헨티나의 악마의 목구멍 등 이과수 폭포 구경


오늘은 남미여행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이과수 폭포를 구경할 계획이다. 어제 낮부터 이어져 온 버스 투어가 오늘 아침까지 이어졌으며, 07시에 차창가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8:25분을 가르키고 있었고 버스 출발 이후 16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차창가의 풍경은 정말 단조롭고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은 누워 있는 것을 제외하고 할일이 없는 것이 지루하였다. 그 나마 차가 까마라서 비록 버스 타고 가는 것이 지루하고 단조로웠지만 별로 불편하지는 않았다. 또한, 눈을 뜨면 항상 푸른 숲이 보이는 점과 하늘이 맑고 쾌청하여 오늘 이과수의 멋진 경치가 기대되는 점이었다. 08:40분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일부 승객들이 하차를 하였고, 약 10분간 정차하고 다시 출발하였다. 남미 여행을 하다보면 종종 도로가의 조그만 집 위에 십자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라고 한다. 땅이 넓어서 도로가에 그런 것을 만들어 놓을 수도 있겠지만 이곳 사람들이 우리보다 감정이 더 풍부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침 9:20분경 과자와 커피가 다시 제공되었으며, 먹고 나서 양치를 하는데 물이 나오지 않아 찬물 한 컵을 얻어 입을 헹굴 수 있었다. 뜨거운 물 한 컵을 추가로 얻어 믹스커피를 타서 차장가로 스치는 풍경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는 맛이 그만이었다. 18시간이 지난 10:20분 이과수 11km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았고 도로는 이차선 도로였다. 10:45분 이과수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였으며, 대절 택시로 숙소에 도착하니 11:10분이었다. 숙소에 짐을 맡기고 다시 숙소로 타고 온 대절택시를 타고 신이 빚은 최고의 대자연 이과수 폭포로 출발하였다.


이과수 숙소의 수영장..


수영장이 아주 보기 좋습니다..


폭포로 출입하는 입구에는 11:55분에 도착하여 입장료 500페소를 지불하고 들어갔다. 잠시 뒤 매표소에서 보트 입장료 450페소를 지불하고 우선 악마의 목구멍부터 구경하기로 하고 기차를 타려다가 걸어가도 30분 정도 걸리지 않는 다고 하여 걸어가기로 하고 가다보니 낮은 트레일인 인테르오르 가는 길이어서 다시 돌아와 기차를 기다렸다. 사실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폭포를 구경하는 방법은 악마의 목구멍, 낮은 트레일인 인테르로르(이곳에서는 보트를 타고 폭포로 들어가는 투어를 할 수 있음), 높은 트레일인 숙떼르오르의 세 가지 코스를 구경하는 것이며, 어느 코스부터 먼저 가도 상관이 없다.


악마의 목구멍 가는 기차역..


코아티(킨코너구리)라는 놈으로 사람들 손에 들고 있는 음식물을 먹으려고 하기 때문에 주의를 해야 된다. 


낮은 트레일 가는 곳에 있는 곳에서 본 모습으로 장인이 직접 목공예를 만들고 있네요.. 


다행히 기차를 빨리 탈 수 있었으며, 13:03분에 기차가 출발하여 13:17분에 역에 도착하였다. 악마의 목구명은 기차역에서 다시 10여분 정도 걸어가야 나온다. 사실 이과수는 폭포가 270여개 넘어 있으며 각각 이름이 별도 있으므로 모든 것을 통틀어서 이과수 폭포라고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이다. 이중 가장 크고 웅장한 폭포가 악마의 목구멍이다.


기차를 타고 이동합니다..


반대편에서 오는 기차부터 보내기 위해 정차하고 있으니 반대편 기차가 들어 오네요.. 


기차역에서 내려 다리를 따라 악마의 목구멍으로 가는 도중에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는 남자싱글 막내를 만났는데 다리 아래에 악어와 자라를 봤다고 하여 아래를 유심히 보면서 가는 도중에 악어는 보지 못하고 자라만 볼 수 있었다. 폭포 ‘악마의 목구멍’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물보라가 엄청나게 일어나고 있었다.


기차역에서 내려 다리를 따라 걸어가면서 본 모습으로 이곳에서 보트를 타려고 하네요..


이런 다리를 따라 갑니다..


자라 한마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악마의 목구멍을 구경하고 있는 관광객들..


물보라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악마의 목구멍에 도착하니 폭포는 엄청나게 컸고 물보라도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으키고 있어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았다. 폭포의 풍경은 Tv로도 여러 번 보았지만 굉음을 내면서 떨어지는 폭포 소리는 직접 그 앞에서 들어보지 않고는 얘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하였다. 악마의 목구멍으로 크고 작은 폭포들이 물을 쏟아 내고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폭포는 정면뿐만 아니라 좌우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어 폭포 전체를 파노라마로 담아 보려는데 물보라가 튀어 전체를 다 담을 수가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물보라가 들이 닥쳤다. 위에서 아래로 솟아 붓는 양이 엄청났으며, 그 규모를 보니 정말 악마의 목구멍이라고 할 만하였다.


악마의 목구멍으로 크고 작은 폭포들이 물을 쏟아 내고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클릭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폭포수가 옆으로 계속해서 이어져 있지만 물보라로 다 담을 수가 없고..


엄청난 규모의 물을 솟아 붓고 있네요..


아래쪽은 물보라로 인하여 보이지가 않습니다..


정말 장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진정 악마의 목구멍이라 할만 합니다..


대충 폭포 구경을 마친 후 다시 열차정거장으로 가는 도중에 새도 볼 수 있었고 ‘악마의 목구멍’ 가면서 보지 못했던 악어도 볼 수 있었는데 악어가 있는 곳에 동전들이 많이 떨어져 있었고 짓궂은 여행객이 악어 머리 위로 물을 부으니 악어가 물 위로 고개를 치켜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라도 새끼가 합류하여 두 마리가 있는 것과 이름모를 새도 볼 수 있었다.


악마의 목구멍을 구경하고 돌아가면서 본 모습..


물을 솟아 붓습니다..


악어 주위로 동전들이 많이 떨어져 있네요..


악어가 다리 근처로 이동을 해 옵니다..


짓궂은 여행객이 악어 머리 위로 물을 부으니 악어가 물 위로 고개를 치켜드네요..



이름모를 새도 있고..


열차정거장에 다시 도착하여 배를 타고 폭포수로 들어가는 체험을 하기 위하여 낮은 트레일인 인테르오르로 이동하였다. 가는 길에 원숭이들도 볼 수 있었고, 크고 작은 폭포들이 볼 수 있었다. 메인 폭포가 살짝 모습을 드러내는데 보트들이 드나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폭포에 무지개가 걸리고 보트 한척이 손살 같이 빠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반대쪽에도 보트 한척이 폭포로 접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폭포로 향하는데 그 기분이 어떨까? 감히 상상이 잘 되지 않고 아마 몸으로 직접 부딪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숭이들도 볼 수 있네요..


난초 종류  같네요..



크고 작은 폭포들이 볼 수 있고..



드디어 메인 폭포가 살짝 모습을 드러냅니다..


보트들이 드나 드는 것이 보이고..


 

폭포에 무지개가 걸리고 보트 한척이 손살 같이 빠져 나옵니다..


반대 방향의 폭포로 이 쪽의 경치가 최고네요..



여기 폭포에도 보트 한 척이 보입니다..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폭포로 향하는데 그 기분이 어떨까..


정말 장관입니다..


순서에 따라 배를 타는데 커다란 방수 팩에 카메라와 배낭 등을 집어넣고 구명조끼를 걸치고 배를 타고 폭포 앞까지 가서 사진을 찍게 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까지 배로 이동하여 폭포수를 정통으로 맞을 때는 폭포수가 얼마나 강한지 정신도 없고 눈도 뜰 수 없을 정도였지만 기분은 최고였다. 그것도 두 번씩 폭포수에 접근하여 물세례를 받았으니 그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로 짜릿했고 한 번 더 해주길 원했을 정도였다.


우리 팀도 순서에 의거 보트를 타고 폭포로 들어 갑니다(조셈 핸폰 사진)


남자 싱글 막내와 함께(조셈 핸폰 사진)



폭포에 계속 무지개가 걸려 있고..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멋집니다..


한국에 이런 폭포 한 두개만 있어도 관광객들이 줄을 이을 것인데..




정말 장관입니다..


이쪽으로 다시 보트 한척이 폭포를 향하여 다가 가네요.. 


작은 보트를 타고 폭포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물을 맞는 순간 온뭄이 얼어 버리는 느낌이었는데..


저 보트에 있는 분들도 잠시 후면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어 버릴 것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낮은 트레일의 폭포 중에 규모로 볼 때 이곳이 가장 하이라이트 인것 같았다.. 


폭포수를 맞고 나와 윗길 트레일 코스인 숙떼르오르로 이동하면서 다시 폭포수를 구경하였는데 계속해서 무지개가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윗길 트레일 코스에서 보는 폭포는 옆 또는 위에서 폭포를 보기 때문에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윗길 트레일의 압권은 마지막 지점에 폭포에 무지개가 걸쳐 있는 것으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윗길 트레일 코스 가면서 본 웅장한 폭포..



쌍폭입니다..


같은 폭포인데 다른 느낌으로..





무지개가 걸려 있고..


정말 웅장합니다..







폭포수 옆의 나무테그로 많은 관광객들이 이동을 하고 있네요..




이곳이 윗길 트레일 코스의 마지막 지점인데 무지개가 선명한 것이 폭포와 어우어져 한 폭의 그림이었다.. 


정말 멋집니다..


아쉽게도 다른 분들만 찍어주고 저는 핸폰으로 밖에 인증을 하지 못했네요..




이과수 폭포 구경을 마치고 숙소로 와서 방 배정을 받고 아르헨티나에서의 마지막 밤을 야외에서 와인을 마시면서 즐겼다. 저녁식사는 22:00시에 호텔에서 유로로 제공하는 아사도와 와인으로 식사를 하였는데 식사 도중에 남자싱글 막내가 술이 과하며 뻗어버렸다. 식사 후 막내를 자기 방에 데려다 주고 내방에 들어와 취침을 함으로써 오늘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다.


내일은 브라질로 이동을 하여 브라질 쪽의 이과수를 보고 리우 데 자네이루로 이동을 하여 자유 시간을 가질 계획이다.

 


 

 


【남미역사에 대하여】

남미는 포루투칼어를 사용하는 브라질을 제외한 모든 나라는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이렇게 된 사유는 1494년에 맺어진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남아메리카를 양분, 서경 50°을 경계로 하여 포르투갈은 대륙의 동쪽을 갖고 스페인은 그 나머지 지역을 차지했기 때문이다.(출처 : Daum백과사전 남아메리카의 역사)

 

이후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1533년에 잉카 제국을 정복했으며, 1538년 히메네스 데 케사다는 치브차족을 복속시키고, 콜롬비아에 보고타를 건설했다. 17세기에 남아메리카에 있는 모든 스페인 땅은 페루 부왕령에 편입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 1세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침략한 것을 계기로 식민지 사람들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이 임명한 총독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1817년 혁명운동은 계속되어 북부에서는 시몬 볼리바르 장군이 군사작전을 개시했고, 남부에서는 호세 프란시스코 데 산 마르틴 장군이 혁명운동을 지도했다.(출처 : Daum백과사전 남아메리카의 역사)


산 마르틴은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장군의 도움을 받아 1818년 칠레를, 1822년에는 남부 페루 지방을 스페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켰다. 볼리바르는 1821년 베네수엘라를 스페인의 억압에서 해방시켰고 북부의 다른 스페인 식민지도 해방시켰다. 1826년 페루의 카야오가 함락되자 남아메리카에서의 스페인 식민통치는 종식되었다. 브라질은 1822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남미 인디오 인구 급감 이유(바야돌리드 논쟁)

 

남미 인디오들의 인구는 스페인의 남미 정복 후 인디오 인구의 90% 가까이 줄어들게 되었으며, 그 이유는 인디오들에게 없던 전염병(페스트, 매독 등), 인디오들에 대한 학살 등을 들 수 있다. 초기 인디오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생각은 바야돌리드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아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511년 성도미니크 수도회의 젊은 신부 몬테시노스가 식민주의자들의 만행을 질타하면서 원주민의 인권을 옹호하게 되고, 1537년 교황 바오로 3세는 인디오들에게 영혼과 이성이 있음을 전제, 잔인한 행위를 금지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원주민들의 인구는 빠른 속도로 감소해 갔다.


이런 상황에서 1550년, 카를 5세가 신대륙 원주민의 지위와 운명을 가름할 위원회를 소집, 논쟁을 벌이는데 이것이 바로 ‘바야돌리드 논쟁’이다. 에스파냐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 바야돌리드에서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와 신학자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가 이 논쟁을 벌여 최종적으로 라스카사스(1484~1566)신부의 주장을 채택하여 인디오들도 영혼과 이성을 지닌 온전한 인간이라고 하여 비인간적으로 학대하고 부당하게 착취하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어 인디오들을 더 이상 학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인디오들을 노예로 삼을 수는 없게 됐지만 인디오의 노동력을 대신할 대안으로 더 야만적이고 동물에 더 가까운 존재들을 노예화하면 된다고 하여 아프리카 '흑인'을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 이후 아프리카 흑인들은 노예사냥의 대상이 되었으며, 미국 남북전쟁 이후부터 서서히 인간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어찌되었던 남미에서 특히 스페인 정복지에서의 인디오 인구는 바야돌리드 논쟁 이전까지 약 90%가 죽음을 당한 것에 대하여 유럽 특히 카톨릭의 책임은 면치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