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산행(2019. 7. 27일 목요일)】인기 백대명산 제95위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으로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 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官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百濟)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溫祚王代)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 (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結)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仁祖)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여장(女墻) 1,897개·옹성(甕城) 3개·성랑(城廊) 115개·문 4개·암문 16개·우물 80개·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純祖)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正祖)22) 한남루(漢南樓)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을 1829년(순조(純祖) 29)에 수리하였다. 관해(官해)로는 좌승당(左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을 비롯하여, 비장청(碑將廳), 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鐘閣)·마구(馬廐)·뇌옥(牢獄)·온조왕묘(溫祚王廟)·성황단(城隍壇)·여단(여壇)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守禦廳)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摠戎大將) 이서(李曙)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縝)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檀)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5개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수어장대의 모습..
• 남문(08:50분) ~ 동문(09:54분)(남문에서 1시간 4분)
남문은 남한산성의 정문으로 4대문 중에 규모가 가장 크며, 조선시대 임금들의 출입문으로 1,779년(정조 3년)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고 한다. 동문가는 성곽 길은 깨끗하게 단장이 되어 산객들을 맞이하고 있었으며, 오르락내리락 이어지는 성곽 길을 걷다 보면 세상의 모든 걱정, 근심도 사라지고 편안한 마음이 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혼자 이 길을 걷는 산객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곳인데 오늘은 날씨 탓인지 별로 없는 것 같다.
남문은 남한산성의 정문으로 4대문 중에 규모가 가장 크며, 조선시대 임금들의 출입문으로
1,779년(정조 3년)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고 한다.
남문 위에서 본 느티나무로 수령 500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남문 위에서 본 모습..
비가 갠 후의 청량감과 이름 모를 새소리를 들으면서 고즈넉한 성곽 길을 따라서 혼자 여유 있게 걷는 기분은 정말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한때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걸었던 이 길을 혼자서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며 걷는 지금이 오히려 더 좋은 것 같다. 제2남옹성에 도착하였으며, 이 옹성은 남한산성에 설치 된 옹성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남한산성에는 이외에도 4개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여름꽃들이 반겨주네요..
복원된 옹성과 검단산이 조망되고..
남한산성에서 규모가 가장 큰 제2옹성치에서 복원중인 제2옹성과 검단산이 조망되고..
《옹성》
옹성은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경사가 완만한 지역의 성문 밖에 또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은 이중 성벽으로 총 5개(동문, 북문 각1개, 남문 3개)가 있다. 제 2남옹성은 둘레가 318m로 다른 옹성과는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복원한 남장대터..
오늘은 날씨가 너무 무덥고 습하여 조금만 걸어도 땀이 온몸을 적신다. 혼자 걷다보니 급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이쯤에서 잠시 물 한잔 먹으면서 쉬었다 간다. 암문이 있어 잠시 바깥으로 나가서 성곽을 구경해 보았으며, 남한산성의 성곽은 기존에 있던 능선을 이용하여 성을 축조하였기에 상당히 예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성곽 안쪽으로 들어와 길을 걷었으며, 잠시 가다보니 복원 중인 옹성이 보였다.
제2옹성치..
암문이 나오고..
바깥쪽에서 본 모습..
남한산성의 성곽 축성술이 특이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일조를 하였다..
복원 중인 옹성입니다..
또 다른 암문이 나왔으며, 이곳 위에서 보는 경치는 아주 그만이었다. 이곳은 예전에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어 포토 존이었는데 지금 새로 단장하였는데 가을에 다시 한 번 와 봐야 될 것 같다. 잠시 뒤 반대편으로 장경사 절과 동문 성곽들이 눈에 들어왔으며, 동문에는 남문에서 약 1시간 4분이 지난 09:54분에 도착하였다.(평소보다 약 20분이 지연되었다)
암문 위에서 본 모습으로 시야가 좋아 멋진 경치를 볼 수가 있네요..
바깥쪽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복원 되었고 이곳이 포토 죤이라고 합니다..
반대편 동문쪽에 있는 장경사 절이 보이네요..
맞은편 성곽길은 동문에서 북문가는 길로 구비구비 이어져 있습니다..
보수 완료 된 동문입니다..
• 동문(09:55) ~ 북문(11:27분)(동문에서 1시간 32분)
동문에서 북문까지는 2.9km로 성문간의 거리가 가장 길며 길도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해야 하므로 힘이 가장 많이 드는 구간이라 할 수 있으며, 가는 도중에 송암정, 장경사 신지옹성, 동장대지터, 돌탑 및 작은 군포지터 등이 있다.
대다수의 성벽은 평평하나 일부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황진이가 심명한 불도를 설법하여 이에 감명 받은 기생 하나가 자괴하여 투신 자살한 지역인 송암정은 동문에서 약 5분 거리에 있으며, 커다란 바위에 生과死의 나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무들은 죽어서도 일정 기간 자기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데 사람들은 죽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니 어찌 보면 사람의 인생이 정말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
송암정에는 生과死의 나무가 있습니다..
동문에서 1.1km 거리에 있는 장경사 신지옹성 가는 길의 성곽 길은 멋진 소나무가 도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장경사 절을 지나 오름길 중간에서 간식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했다. 간간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온몸을 시원하게 해 줄뿐 아니라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 주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설교를 들으면서 지나가는 산객을 볼 수 있었는데 마치 구도자처럼 보였다. 오늘같이 습하고 무더운 날씨에 산길을 걷는 사람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간에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길에 답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길에서 묻고 그리고 길에서 그 해답을 찾는 것이 맞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소나무들이 멋지게 도열하고 있는 이런 성곽길을 것는 것 자체가 힐링이라 할 수 있겠지요..
송암정에서부터 장경사지옹성을 지나 오르막까지 보수가 완공되었네요..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이 구비구비 이어지는 성곽 길이 계속되고..
약 15분간 휴식 후에 다시 짐을 챙겨 길을 떠났으며, 잠시 후 장경사 신지 옹성 암문에 도착하였다.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석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 있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은 곳으로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고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장경사 신지 옹성 암문은 폭이 1.3m 높이가 1.42m로서 다른 암문에 비해 비교적 큰 편이다. 장경사 신지옹성은 길이가 159m로 한봉성과 봉암성에 대한 방어를 주목적으로 설치하였으며, 옹성 끝에 2개소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문으로 들어가서 본 장경사 신지옹성 ..
장경사 신지옹성을 지나 오름길 중간에서 간식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했다. 간간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온몸을 시원하게 해 줄뿐 아니라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 주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설교를 들으면서 지나가는 산객을 볼 수 있었는데 마치 구도자처럼 보였다. 오늘같이 습하고 무더운 날씨에 산길을 걷는 사람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간에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길에 답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길에서 묻고 그리고 길에서 그 해답을 찾는 것이 맞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위에서 본 장경사 신지옹성..
오름길 끝 지점에 동장대터가 있었으며, 그 앞에는 여장이 있었는데 아직 보수가 되지 않은 형테 그대로였다. 여장은 성 위에 낮게 만든 것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동장대터를 지나 잠시 진행하면 제3암문인 봉황성암문이 나온다. 이곳에서 벌봉까지는 0.5km로 벌봉을 갔다 오려면 왕복 1km가 소요되어 그냥 통과하였다.
보수가 되지 않은 여장 앞의 성곽 위에 꽃이 피어 있고,,
여장입니다..
벌봉으로 갈 수 있는 제 3암문의 모습..
《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로 대다수 규모가 작으나, 이곳 제3암문은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다른 암문에 비해 규모가 큰 편이다.
공장지대가 보이고..
다시 가파른 내리막길 계단을 지나면 제4암문인 북암문이 나왔다. 제4암문을 지나면 그때부터 길은 평이해지고 한참을 가다 보면 마치 쌍둥이 같은 소나무 두 그루가 성곽 밖으로 볼 수 있는데 정말 멋지다. 성곽 길이 너무 멋있게 조성되어 있어 찬사가 절로 나왔다. 멋진 소나무들이 서 있는 지역에 올라서면 북문이 보이며, 북문은 동문에서 약 1시간 32분이 소요된 11:27분에 도착하였다.
제4암문(북암문)..
소나무와 어우러진 멋진 성곽 길이 마치 뱀이 기어가는 것 같네요..
《남한산성 소나무》
남한산성의 소나무는 일제시대 당시 국유림으로 조성하여 벌채를 금지하는 금림조합으로 보호하여 서울 근교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남문 ~ 북문에 대다수가 위치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문에서 남문 방향의 소나무의 자태는 너무 아름다워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성 바깥에 있는 멋진 소나무..
여기도 멋진 곳이네요..
북문입니다..
• 북문(11:40분) ~ 서문(11:58분)(북문에서 18분)
북문에서 서문까지는 1.1km거리로 바깥쪽으로 진행을 하려고 하였으나 출입이 통제되어 잠시 쉬었다가 성곽 안으로 걷기로 하였다. 바깥쪽 소로 길을 따라 걷으면 조용히 산책하면서 걸을 수 있는 점과 야생화를 보는 재미 및 성곽의 생김과 보수한 것들을 자세히 볼 수 있어 재미가 솔솔한데 아쉬웠다. 특히 북문에서 서문가는 외곽길에는 남한산성에서 최고의 조망을 볼 수 있는 연주봉 옹성으로 갈 수 있는데 오늘은 갈 수 없을 것 같다. 북문 성곽에서 서문 성문까지는 지금 거의 전체를 보수 중에 있는 것 같았다. 서문에는 북문에서 약 18분이 소요된 11:58분에 도착하였다.
바깥 길은 통제되어 있습니다..
이곳에도 소나무들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서문의 모습..
• 서문(12:18분) ~ 남문(13:27분)(서문에서 약 1시간 9분)
서문은(우익문) 적의 공격(광나루나 송파나루)을 가장 받기 쉬운 지역임을 고려하여 문루를 다른 문에 비해 약 1/3수준으로 작게 하였다. 11:59분 서문에서 외곽으로 진행하다가 연주봉 옹성에서 멋진 조망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 북문 방향에 있는 전망대를 잠시 들러 보았다. 이곳 전망대에서는 청계산, 관악산, 북한산, 도봉산 등과 함께 병자호란 때 치욕을 당했던 삼전도가 있었던 지역으로 현재는 수도 서울의 랜드마크가 있는 롯데월드가 보였다. 이곳 전망대가 연주봉 옹성 전망대보다 더 나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며, 잠시 머물다가 서문으로 다시 출발하여 12:18분 다시 서문에 도착하여 수어장대를 향해서 출발하였다.
바깥쪽에서 본 서문..
서문에서 북문 방향으로 조금 가다보면 있는 전망대..
서문 밖에 있는 전망대에서 본 모습(이곳에서는 청계산, 관악산, 북한산, 도봉산 등도 보입니다)..
외곽으로 돌다 보면 야생화들과 성곽들의 아름다운 외면 등도 볼 수 있고, 성곽 밖으로 뻗어 나온 나무들의 자태와 때로는 성곽안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예전에 성문 출입시 돈을 받을 때는 종종 월담을 한 산객들도 있었는데 잡히면 과태료가 10만원이었다. 12:33분 외곽 길을 따라 수어장대로 이어지는 제6암문으로 나왔다. 남한산성에는 다섯 개의 장대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유일한 장대가 수어장대이며, 그곳에는 멋진 향나무와 소나무가 있다.
북문에서 서문까지 보수중 이며, 서문에서 바깥쪽으로 돕니다..
성곽 밖에서 본 모습..
성곽을 따라 소나무들이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오늘 새벽에 내린 빗방울이 아직 남아 있네요..
성곽안의 풍경도 엿볼 수 있고..
수어장대로 나가는 제6암문(서암문)..
현재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수어장대..
《장대》
장대는 전쟁시 장군의 지휘소로 남한산성에는 5개장대가 있었으나 현재는 영조때 증축한 수어장대만 보존되어 있다.(수어장대는 최초 서장대로 단층이었으나 영조가 2층으로 증축하였다)
수어장대 옆의 멋진 소나무..
보호수인 향나무..
수어장대에서 행궁이 있는 종로 바로 가기 위해 소나무 숲길을 따라 하산을 하였으며, 어느 정도 가다보니 숲길을 벗어나 임도를 따라 진행하게 되어 오늘 출발지인 남문으로 진로를 변경하여 갔으며, 남문에는 1시간 9분이소요된 13;27분에 도착하여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하였다.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가 예쁘게 피어 있네요..
멋진 소나무숲이 있고..
남문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무리 합니다..
남한산성에는 좌익문, 우익문, 지화문, 전성문의 4개의 문이 있다. 이 중에서 남문인 지화문은 동문인 좌익문과 함께 남한산성의 핵심도로인 봉화로에 설치된 문으로 왕의 행렬, 마차와 수레. 주민들이 드나들었던 문으로 남한산성 옛길을 따라 동문인 좌익문과 이어지게 된다. 남한산성 옛길은 산성 로터리를 중심으로 북문 ~ 서문 ~ 남문을 일주하는 노선을 따라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남문에서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비석군을 잠시 둘러 보았다.
남한산성 비석군을 잠시 들러보고..
▶산행 후기
남한산성은 「칼의 노래」작가 김훈 선생의 작품에서 병자호란 당시 한겨울 고립무원의 남한산성내에서 벌어지는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 간의 말싸움과 '죽어서도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라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처절한 고뇌를 엿보게 해주는 역사가 있는 곳이다. 당시 사정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조선은 싸움다운 싸움을 할 수 도 없는 전력으로 청나라에서는 포위만 한 채 조선의 자중지란이 일어나도록 기다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며, 결국 청의 뜻대로 이듬해 당시 임금인 인종이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남한산성은 한 번도 함락되지 않은 대외항전 전적지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치욕을 간직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과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을 비교해 보면서 걷다 보니 현재 상황과 이에 대처하는 위정자들의 수준이 병자호란 당시와 참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빨리 국민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병자호란의 교훈을 되새겨 최선의 대책을 강구하기를 기대해 본다.
【병자호란과 현재의 대한민국】
사실 남한산성은 치욕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현장이다. 병자호란(1636년 12월) 때 남한산성에서 47일간 버티다가 왕자가 항전 중인 강화가 함락하고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어 1637. 2.24일 인조가 현재 잠실 롯데월드 앞에 있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이 앉아 있는 단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며 항복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청은 철군하면서 수십만에 달하는 조선백성을 포로로 끌고 갔다. 생각이 없는 군주와 정쟁만 일삼았던 위정자들 때문에 힘이 없었던 백성들만 곤혹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무릇 군주라 함은 백성들을 배불리게 먹이고 안전을 책임져야 함에도 조선의 군주들은 백성들의 안위는 생각지도 않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피난을 가고 무책임한 전쟁을 끌어갔다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싸움다운 싸움을 할 수도 없는 전력이었으며, 청은 조선이 스스로 항복하기를 기다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남한산성에서 항전 중에도 척화파와 주화파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벌였으며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자 결국 항복을 하고 말았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는 결국 역사의 몫이지만 당시 조선은 전쟁을 치룰 만한 군사적 힘과 경제력이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청과의 전쟁이 일어나도록 방치 또는 부축인 듯한 느낌이 든다. 그 결과 임금은 굴욕을 당하고 힘없는 백성들 수십만이 청에 끌려가 노예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요즘의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정세에 비추어보면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핵을 보유한 상태에서 운반 수단인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여 시험 발사하고, 러시아와 중국은 우리 영공을 침범하고, 무엇보다도 일본은 우리산업의 핵심인 반도체 핵심부품을 규제함으로써 경제전쟁을 야기하고 있고, 전통적 우방이었던 미국도 WTO에 한국을 개도국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하고 있어 사면초가에 빠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인 정부는 북한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고, 중국과 러시아에게도 어필만 할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일본이 잘못했다는 말만 할 뿐이고 별다른 대책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의 백색국가배제 추가조치가 발효되면 우리경제는 걷잡을 수없는 추락의 길로 들어 설 것이 불을 보듯 명백한데도 강대강으로 일본을 자극하는 말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정말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병자호란 당시 대책도 없이 끝까지 싸워서 명예를 얻고자 하다 43일 만에 치욕적인 굴복을 하였던 역사의 교훈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조선 정부가 대책도 없이 두 달간 논쟁만 하고 있는 동안 조선의 온 산하는 청의 침략에 노략질을 당하고 수십만의 선량한 백성들은 결국 포로로 청에 끌려가고 말았다.
외교는 빵점이요, 대책은 전무하고 자존심만 내세우고 반대를 하면 친일파라 몰아치고 나라경제가 어떻게 되든 자기들의 체면만 중시하는 이 나라 정부를 믿고 살아가야 하는 국민들만 불쌍한 것 같다. 정부 여당의 싱크탱크라는 민주연구원에서는 7.31일 “한·일 갈등이 총선에 긍정적"이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내면서 이번 사태로 반일감정을 부축혀 내년총선까지 이어가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기업은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현실에 나라 경제가 어떻게 되든 말든 총선승리만 생각하는 집권여당의 행태에서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오만의 극치를 보는 것 같다.
진정한 국가의 지도자는 국가 안위와 국민들 먹거리를 위해서는 현재의 치욕을 감수하더라도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모두 버리고 오직 국민만을 위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현재의 치욕은 국력을 키우면 언제든지 되갚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등소평은 중국의 장래에 대한 전략을 일러 주면서 앞으로 100년은 미국에 맞서지 말라 하였다. 바로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감추고 실력을 길러 때를 기다리란' 말이 절실히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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