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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대명산 산행기/서울,경기

남한산 송년산행(20.12.26)

by 산사랑 1 2020.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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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산행(2020.12.26일 토요일)】인기 백대 명산 제95위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으로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 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官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百濟)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 왕대(溫祚王代)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 (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 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 결(結)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仁祖)2)이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여장(女墻) 1,897개·옹성(甕城) 3개·성랑(城廊) 115개·문 4개·암문 16개·우물 80개·샘 45개 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純祖)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下闕)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正祖) 22) 한 남루(漢南樓)를 세우고 1624년에 세운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을 1829년(순조(純祖) 29)에 수리하였다. 관해(官해)로는 좌승당(左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을 비롯하여, 비장청(碑將廳), 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鐘閣)·마구(馬廐)·뇌옥(牢獄)·온조왕 묘(溫祚王廟)·성황단(城隍壇)·여단(여壇)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僧徒廳)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는 처음에 총융청(摠戎廳)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守禦廳)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摠戎大將) 이서(李曙)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縝)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三田渡受降檀)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연주봉 옹성..

건강셀프등산회 제733차 산행은 금년 송년산행으로 '역사가 살아 숨쉬는' 남한산이 추진되었다. 요즘 산행은 코로나 19로 인하여 이른 아침 자차를 이용하여 근교산행을 주로 다닌다.  남한산은 일년에 3~4번은 가지만 일출은 한 번도 보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볼 수 있어서 정말 행운이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행은 장경사 신지 옹성에서 일출을 본 후 ~ 벌봉 ~ 한봉 ~ 북문 ~ 서문 ~ 남문 ~ 동문 ~ 장경사지 주차장 원점회귀로 추진하였다. 

 

산행은 장경사지 주차장 ~ 동장대지 ~ 벌봉 ~ 한봉 ~ 북문 ~ 서문 ~ 남문 ~ 동문 ~ 장경사지 주차장의 원점회귀로 진행..

옹성 성곽내의 나무 한그루와 산봉우리 위로 떠오른 해가 조화를 이루어 멋진 풍광을 보여 줍니다..  

10분 정도 일출을 보고 옹성 바깥으로 나오니 억새 사이로 해를 볼 수 있더군요..

일출을 보았던 장경사 신지 옹성이 보입니다..

이 위쪽이 동장대터가 있습니다..

벌봉, 한봉 가는 길입니다..

제3암문(위 좌측)을 지나 벌봉 가는 길에 있는 12 암문(위 우측/남한산에는 16 암문이 있음)과 동장대터(아래)..

멋진 소나무 한그루가 무너잔 성곽을 지켜주는 것 같습니다..

벌봉 가는 길의 성곽은 전혀 보수가 되어 있지 않고, 벌봉은 정상석이 없이 나무에 표시만 있네요..

【남한산 벌봉(515m)】

봉암성이라고 하는 남한산 벌봉(515m)은 벌봉 암문에 연결된 남한산성의 일부로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하여 벌봉이라 한다.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정기가 서려 있는 벌봉을 깨트려야 산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 하여 이 바위를 깨트리고 이곳에서 진을 친 다음 전투는 하지 않고 인조와 조선군이 피신해 있는 남한산성을 내려다보면서 항복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청나라는 명과의 국운을 건 전쟁을 치르려고 하던 시기로 청 태종이 남한산성까지 와서 성을 깨뜨리지 않고 조선의 항복을 기다린 것은 조선의 실질적인 항복을 원했기 때문이다. 벌봉은 수어장대(497m) 보다 높기 때문에 남한산성의 서쪽 내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보여 이 지역을 점령한 청나라 군은 남한산성 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고 화포로 성안까지 포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남한산은 한 번도 외침을 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치욕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벌봉에서 한봉까지는 1,6km 거리이며, 가는 길에는 봉암산성 신축비가 있고 성곽은 거의 방치되어 있습니다..

콩새라는 철새라고 합니다..

제14암문으로 위쪽을 보수하였네요..

한봉 정상인증..

한봉에서 벌봉 가는 길에서 본 남한산성 성곽과 장경사 신지 옹성..

여기 성곽은 나름대로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한봉 가는 길..

동장대터가 있는 길..

제3암문을 지나 다시 성곽을 따라 진행하였으며, 이곳은 제4암문으로 바깥쪽에 잔설이 남아 있네요..

남한산 성곽길을 따라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이 모습이 정말 장관입니다..

남한산에는 멋진 소나무들이 곳곳에 있으며, 좌측은 성 바깥쪽에 있는 소나무이고 우측은 성 안쪽에 있는 소나무입니다..

끊어질 듯 이어져 잇는 성곽은 마치 뱀이 기어가는 것 같이 곡선미가 아름답습니다..

소나무가 굽어보고 있는 이 길도 참으로 예쁜 길입니다..

북문입니다..

북문에서 남문까지는 탐방로 재포장 사업으로 공사기간(21.02.10일까지) 출입을 통제하여 바깥쪽으로 걸어야 됩니다..

북문 바깥쪽으로 진행합니다..

 바깥쪽에서 본 성 안쪽의 멋진 소나무..

남한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주봉 옹성..

연주봉 옹성에서 본 산 능선..

오늘도 날자.. 날아보자..

서문 전망대에서 본모습으로 시야가 좋지 못하여 멀리는 보이지 않고, 앞쪽의 남성대 골프장 지역에 아파트를 짓고 있네요..

서문입니다..

서문지나 바깥쪽에서 본 안쪽의 모습으로 예전에는 넓은 공터에서 막걸리를 팔곤 했었는데..

계속해서 바깥을 따라 진행합니다..

통상 수어장대가 있는 제6암문에서 수어장대를 보고 성 안쪽으로 진행했으나, 오늘은 바깥쪽으로 처음 진행하였는데 성 바깥쪽에서 보는 성곽 안쪽은 소나무들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성곽과 어우러져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네요..

조선시대 왕의 출입문이었던 남문입니다..

남문은 남한산성의 정문으로 4대 문 중에 규모가 가장 크며, 조선시대 임금들의 출입문으로 1,779년(정조 3년)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 남문 앞의 500년 된 느티나무는 고사 직전 이어 안타깝습니다..

성문 바깥으로 인도와 차도가 나란히 있습니다..

남한산의 성곽길은 성곽 축성술이 특이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일조를 하였다..

복원 중인 옹성으로 남한산에는 옹성이 다섯 군데 있는데 남문에서 동문 사이 세 개가 있습니다..

동문 방향의 절(이 절은 비구니들이 수행하시는 망월사라고 합니다)을 당겨봅니다..

동문과 망월사..

동문 앞에 새로 조성된 암문으로 신유(1801년)/기해(1839년)/병인(1866년) 박해 당시 천주교인 300명이 이곳 앞 개울에 버려져서 방치되었다고 합니다..

동문입니다..

황진이가 심명한 불도를 설법하여 이에 감명받은 기생 하나가 자괴하여 투신자살한 지역인 송암정 앞에 있는 生과死의 나무로 이 중 고사목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내부' 벼슬을 내려 '대부송'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장각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약 6시간 40분에 걸친 남한산성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산행 후기

 

남한산성은 「칼의 노래」 작가 김훈 선생의 작품에서 병자호란 당시 한겨울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내에서 벌어지는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 간의 말싸움과 '죽어서도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라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처절한 고뇌를 엿보게 해주는 역사가 있는 곳이다. 당시 사정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조선은 싸움다운 싸움을 할 수 도 없는 전력으로 청나라에서는 포위만 한 채 조선의 자중지란이 일어나도록 기다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며, 결국 청의 뜻대로 이듬해 당시 임금인 인종이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전 국토가 유린되고 죄 없는 백성들 20만 이상이 청나라에 노예로 끌려가는 등 씻지 못할 치욕을 당했다. 무릇 위정자는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되는데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이를 도외시하여 자신들의 안위와 허명만을 우선 시 하다 보니 죄 없는 백성들만 고초를 당했다.

 

남한산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시국이 어려울 때면 찾게 되는 것 같다. 금년 한 해를 돌아보면 가장 큰 이슈는 코로나 19로 현재 확진자가 년 천명씩 발생하여 방역당국을 곤란하게 만들고 서민들은 말 못 할 고통의 늪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금년 초 만해도 대구 신천지 사태가 마무리됨에 따라 코로나 사태가 다소 진정되는 기미가 보이자 정부는 전 세계에 k방역 홍보에 열을 올리느라 백신 확보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 지금 우리나라는 백신 확보에 이 순위로 밀려 내년 2/4분기나 되어야 백신 접종이 가능할 것으로 예측되어 정부의 코로나 19 늦장 대응으로 국민들을 삶의 질은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두 번째 이슈는 부동산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현미 장관 재임기간 중 24차례에 걸친 백해무익한 처방으로 집값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 높은 증가율을 보였으며, 이와 더불어 전세대란을 불러일으켜 서민들은 이제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는 청약을 통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청약을 통해 당첨만 되면 시세의 두 배가 되는 로또가 되게 만들어 국민의 절반이 주택 청약 통장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되었다. 부동산을 잡는다는 미명 하에 주택 관련 각종 세금은 대책 없이 올려 해를 거듭할수록 세부담에 가중되고 있고 집값은 가파르게 오르고 전세대란에 죽어나는 것은 서민들뿐이니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이슈는 정부의 검찰개혁이란 미명 하에 윤석렬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사건으로 법무부징계위원회에서 정직 2개월을 내리고 이를 토대도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재청을 받아 문제인 대통령의 재가가 있었으나 법원에서 집행정지 판결을 내려 급기야는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에 이르게 되었다. 사실 검찰개혁의 핵심은 그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감찰의 힘을 빼기 위하여 수사와 기소의 분리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기소와 수사의 분리는 법이 통과하여 내년부터 시행되고, 이와 별도로 기소와 수사를 모두 가지고 있는 공수처까지 통과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는 것인데 원전 수사, 울산시장 선거부정 등 정권 실세들에 대한 수사로 자기 정권 치부를 수사하는 검찰이 못마땅하여 검찰총장을 징계하려다가 대망신을 당한 것이다. 이들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에는 관심이 없고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여권의 일부는 사법개혁과 윤총장 탄핵을 거론하니 이들은 삼권분립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 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네 번째 이슈는 작년에 최고 이슈였던 조국 사태의 한 부분으로 정경심 교수에 대한 법원 선고로 딸 입시비리와 사모펀드 의혹 등 총 15개 혐의 중 11개가 유죄로 판명되어 징역 4년을 선고한 것이다. 조국 사태는 진영 대결로 번져 우리 사회를 양극화시켰으며 국론을 분열시겼다, 정경심 교수에 대한 형량이 조금 과하다는 의견에 대하여 법원에서는 정경심 교수가 전혀 반성을 하지 않고 오히려 올바르게 진술한 사람들에게 위해가 가하는 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법원의 판단에 대하여 여권과 청와대는 당혹과 실망을 넘어 충격이 뒤섞인 반응을 보이고 있고 야권에서는 ‘사필귀정’이라고 했다.

 

다섯 번째 이슈는 는 오거돈 부산시장과 서울시장 박원순의 성추행 사건으로 오거돈 시장은 사퇴하고 박원순 시장은 자살하여 공석에 대하여 내년 4월에4 재보궐선거를 할 계획이다. 2018년 충남지사 안희정의 성폭행 사건에서 시작되어 금년 부산시장,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으로 민주당 출신의 자치단체장들의 성인지 부족이 도를 넘어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었다. 특히,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추악한 뒷모습이 드러난 이른바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벌어진 지 불과 2년 만에 또다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탓에 국민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고 자부하는 이들의 성관련 범죄는 민주화와 시민사회운동을 하던 시기 권력과는 무관했던 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다 보니 권력에 취해서 저지른 권력형 성범죄사건으로 더 이상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안 될 것이다.

 

현재도 문대통령 아들 문준용 씨의 예술지원금 논란, 이용구 법무차관의 폭행사건, 변창흠 국토부 장관의 언행 논란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위정자들이 치열하게 논쟁만 하다가 치욕을 당한 사실을 곱씹어 보면 개인은 자신의 안위나 허명을 위해도 그 피해가 개인에게 돌아가지만 지도자가 잘못을 하는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랫사람에게 돌아감을 알 수 있다. 무릇 장수된 자는 부하들의 안위를 걱정해야 되고 왕은 백성들의 안위를 염려해야 되듯이 대통령은 정권의 이해득실보다 오직 국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데 최우선적 가치를 둔 정책을 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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