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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축제, 볼거리 등)/풍경(충청)

성주사지(21.01,24)

by 산사랑 1 2021.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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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셀프등산회 제737차 산행인 보령 성주산 산행 전에 들렀던 성주산지입니다..  

 

【성주사지】

 

사적 제307호.〈삼국유사〉권1 태종춘추공조에 의하면 백제 법왕이 창건한 절로 처음에는 오합사라고 불렀으나 신라 문성왕(839~859) 때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이 가람을 크게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성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성주사로 개명된 것은 성인이 거하는 절이라는 뜻인데, 성인은 신라 말기의 명무염국사를 일컫는다. 또한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는 적마가 나타나 밤낮으로 울면서 절 주위를 맴돌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절은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 사찰로 무염국사가 성주사의 주지로 있을 당시 성주사는 불전 80칸, 수각 7칸, 고사 50여 칸 등 천여 칸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 때 성주사에서 정진하는 수도승만 2,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지금까지 절터만 남아 있다. 1968, 1974년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해 금당·삼천불전지·회랑·중문 등의 건물지가 밝혀졌으며, 이때 통일신라시대의 소조불두와 백제·통일신라·고려 시대의 와당류가 출토되었다.

 

절터 서북쪽에는 제법 멋을 부려 세운 전각이 있는데, 그 안에 부도비가 있다. 무염국사 입적 두해 뒤에 세운 부도비로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글을 짓고 그의 조카 최인연이 글씨를 썼다. 이 부도비는 전해오는 신라의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높이 4.5미터, 폭 1.5미터, 두께 42센티미터로 거의 원형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또한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 역시 조각이 화려하고 뚜렷하여 신라 부도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현재 중요문화재로는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5층 석탑(보물 제19호), 동서 일렬로 배치된 보령 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과 보령 성주사지 서 3층 석탑(보물 제47호), 성주사지 동 3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성주사지 석등(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심연동 계곡을 등지고 성주사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5층 석탑이다. 오층 석탑 뒤편에 세기의 석탑이 어깨를 나란히 서있다. 모두 삼층석탑으로 신라 하대의 것으로 짐작된다. 성주사지는 자녀들과 둘러보기에 더욱 좋은 곳이다. 성주산 휴양림과 석탄박물관, 심원동계 곡 등의 관광 명소가 성주사지 가까운 곳에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출처 : 다음 백과를 중심으로 재작성)

 

성주사지의 유물이 다 들어 있습니다..

석등 뒤로 보물인 5층석탑이 자리 잡고 그 뒤쪽에 삼층석탑 3기가 있으며(중앙 3층 석탑은 5층 석탑에 가려 보이지 않음)

우측 동 3층석탑 뒤로 석불입상, 좌측 서 3층 석탑 옆으로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가 자리 잡고 있다.. 

산행지 가는 길에서 본 일출..

관리사무소 건물 안에 목련 꽃봉우리가 봄맞이 준비를 하더군요..  

남해화상탑비(국보 제8호)와 부도비..

낭혜는 무염국사의 시호이며, 신라 태종 무열왕의 8대손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 열세 살의 나이에 입문한 낭혜는 21세에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나 그곳에서 선종을 익혔다. 귀국하여 성주사의 주지가 되어 신라의 선종을 크게 융성시킨 낭혜는 8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으며, 진성여왕이 낭혜를 기리기 위해 시호와 함께 부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무염국사 입적 두해 뒤에 세운 부도비로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글을 짓고 그의 조카 최인연이 글씨를 썼다.

이 부도비는 전해오는 신라의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높이 4.5미터, 폭1.5미터, 두께 42센티미터로 거의 원형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또한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 역시 조각이 화려하고 뚜렷하여 신라 부도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비신의 재질은 성주산이 주산지인 남포 오석이다. 재질이 강하고 아름다워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는 남포 오석의 비신에는 5천 여자의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석불입상(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73호)..

성주사지내 강당지 동편에 있는 석불입상으로 얼굴이 타원형으로 인자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얼굴 부위, 목 부위, 가슴 부위가 일부 훼손되어 있으며 지대석의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기에 옮겨온 것으로 추정하며, 조성시기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 중·후반기에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삼층석탑은 현재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사적기〉에 의하면 3기의 3층석탑은 3세 불인 정광불·약사불·가섭불의 사리탑이라고 한다

좌측 사진 : 동 3층석탑(보물 20121호)으로 높이 4.6m. 성주사 옛터 금당(金堂) 자리 뒤편 동쪽에 위치한 3층 석탑

중앙 사진 : 중앙 3층 석탑(보물 제20호)으로 높이 3.7m.  좌우에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세웠다.

우측 사진 :  서 3층 석탑(보물 제47호)으로 높이 4.0m. 성주사 옛터 금당(金堂)자리 뒤편 서쪽에 위치한 3층석탑

 

성주사지 석계단(충청남도 무형무(충남 무형문화재 제140호)..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성주사의 금당에 오르는 돌계단이다. 이 계단 양쪽에는 사자상을 조각하여 세워 놓았었는데 그 조각 수법이 뛰어났다. 그러나 1986년 도난당하고, 현재 것은 사진을 기초로 복원한 것이다.

 

성주사지 석등(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성주사지의 5층 석탑 앞에 있는 높이 2.2m의 작은 석등으로 8각을 기본으로 하였다. 조각이 조잡하고 간석이 가늘고 길어 균형이 맞지 않는 점, 창에 문의 고정 흔적이 없고 등을 봉안하는 내부가 비실용적인 점 등으로 보아 석탑보다는 시대가 뒤떨어진 형식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심연동 계곡을 등지고 성주사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5층 석탑(보물 제19호)이다.

높이 6.6m. 이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으로 층수만 다를 뿐 각부의 세부 표현이나 양식 등은 3기의 3층 석탑과 거의 유사하다.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성주산 산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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