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셀프등산회 제918~919차 산행은 통영 미륵산, 사량도 지리산 등이 추진되었다. 첫째 날 미륵산이 추진되어 서울에서 8시 출발하여 들머리인 용화산 주차장에서 식사를 하고 도솔암까지 이동하여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였다. 미륵산은 21.12월 추진한 곳으로 그 당시에는 미륵산에서 일출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오후 산행을 하였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산객들이 많지 않아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었으며, 산행 후 도솔암에 들러 주지 스님과 차 한잔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미륵산 산행 후 중앙시장에 들러 밀치회와 통영 굴을 구입하여 숙소(경찰수련원)에서 막걸리 한잔을 하면서 통영 2박 3일의 첫째 날 여정을 마무리하였다.
미륵산 정상..
【미륵산 산행(2024.14. 28일)】인기명산 97위
미륵산(彌勒山 461m)은충무시와 연육교로 이어지는 미륵도(彌勒島)의 중앙 한복판에 우뚝 솟은 위풍당당한 산으로 용화산(龍華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산에 고찰 용화사가 있어 그렇게 부른다고도 하고, 또 이 산은 미륵존불(彌勒尊佛)이 당래(當來)에 강림하실 용화회상(龍華會上)이라 해서 미륵산과 용화산을 함께 쓴다고도 한다. 산봉우리에 옛날 통제영(統制營)의 봉수대터가 있고 미륵산 자락에는 고찰 용화사와 산내암자로 조선 영조 때 창건된 관음암, 고려 태조 때 도솔선사가 창건한 도솔암이 있고 고승 효봉(1888~1966년)이 머물렀던 효봉문중(曉峰門中)의 발상지 미래사(彌來寺)가 있다.
미륵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명산으로서 덕목을 두루 갖추고 있어 울창한 수림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고 갖가지 모양의 기암괴석과 바위굴이 있다. 고찰과 약수, 봄 진달래와 가을 단풍이 빼어나고 정상에 오르면 한려해상의 다도해가 조망이 일품이며, 청명한 날에는 일본 대마도가 보인다. 미륵산에는 국내에서 제일 긴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어 케이블카를 타고 10여분 만에 상부 역사에서 내려 15분을 걸으면 정상에 이른다. 산행코스로는 봉평동 용화사 광장을 기점으로 하는 코스와 산양읍 미래사 입구에서 올라가는 코스가 있으며 봉우리까지 40분이면 충분하다.
산행 들머리인 도솔암..
당포해전 격전지..
용화사..
통영항도 조망되고..
멋진 바위 위로 까마귀가 날고..
멋진 소나무가 보이고..
산불감시초소가 멋진 곳에 자리잡고 있고..
한산대첩 이곳 바다에서 일어났습니다..
【한산대첩】
한산대첩(1592.7.8일) 전날 아침 일본군은 지금의 거제인 견내량에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구키 요시타가(九鬼嘉降)·가코 요시아키(加藤嘉明) 세장수의 지휘 아래73척이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고 이순신 장군은 전날 저녁 당포에 도착하였다. 적군은 이순신 장군 함대의 도착 사실을 몰랐지만 이순신 장군은 적의 도착을 사전에 인지하여 은밀하게 한산도로 함대를 이동시켜 방화도와 화도에 일부 함선을 숨겨 둘 수 있었다. 그 이후 쾌속선 5척을 적진으로 보내 적을 도발하여 한산도로 유인하였으며, 적군은 아군 함정이 다섯 척 밖에 없는 줄 알고 격파하기 위하여 전 함대를 발진시켰다. 사실 견내량에서 보면 화도와 방화도가 하나의 섬인 것처럼 보여 적은 오판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순신 장군은 넓은 바다로 적을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으로 일본 함대를 포위하여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은 생포하였으며 9,000여 명의 적군을 수장시켜 한산대첩을 마무리하였다. 이 해전에서 아군의 희생은 사망 10여 명뿐이라고 한다.
이틀 후인 7.10일 새벽에는 안골포에 숨어 있던 왜적선 42척을 불태웠으며, 그 후 히데요시는 왜군을 부산포 등 안전한 포구에 주둔하게 하고 조선 수군과는 가급적 해전을 피하도록 명했다. 이로서 이순신 장군은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호남을 지킬 수 있었고, 왜군은 임진왜란에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도고가 러일전쟁 당시 대마도 해전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한 전술이 이순신 장군의 학익전을 본 딴 전술이었고, 지친 러시아 함대를 상대한 것에 비하면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이 일본의 정예함대를 상대로 한 해전이라 할 수 있다. 미륵산 정상에서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떠올리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실감할 수 있었다. 만약 도고가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을 참고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지친 러시아 함대라도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면 임란 당시 우리나라를 지킨 전술이 400년 지나 일본이 이를 이용하여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결국 대한제국을 합병시키는 역할이 된 것은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 본다.
미륵산 정상으로 360도 조망이 됩니다..
미륵산 정상 인증..
정상에서 본 한려수도..
【한려수도】
전라남도 여수시, 경상남도 사천시·거제시·통영시·하동군·남해군 등 2개도 4 개시 2개군에 걸쳐 있다(한려수도). 한려(閑麗)란 한산도의 '한'(閑) 자와 여수의 '여'(麗) 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1968년 12월 해상공원으로는 처음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 지역에는 자연경관이 수려한 다도해·비진도·한산도·거제 해금강 등 해상관광자원이 풍부하며,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을 대파한 이순신 장군의 유적이 많아 역사의 산현장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기후가 온화해 동백나무·비자나무·유자나무·풍란 등 난대성 식물이 자생한다.
청정해역을 자랑하는 이곳은 섬과 섬 사이를 누비며 내닫는 산뜻한 쾌속정의 항로도 일품이거니와 석양 비친 물길 위에 범선 두어 척 가는 듯 오는 듯 무심히 떠 있는 정경은 한려수도 아니면 맛볼 수 없는 낭만의 극치이다. 더구나 이 해역은 수온과 수질이 어족 양식에 최적지로 꼽히고 있어 우리나라의 수출전략 어종이 많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바다 낚시터로도 더욱 각광을 받고 있으며 많은 해수욕장이 이 해역의 연안에 산재하고 있다.
이 국립공원은 거제해금강지구, 통영·한산지구, 사천지구, 남해대교지구, 상주·금산지구, 여수·오동도지구 등 6개 지구로 구분된다. 이중 통영·한산지구는 통영시 일부 지역과 한산도를 비롯한 미륵도·추봉도·죽도·용초도·선유도·도곡도·연대도·비진도 등을 포함한 지역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함은 물론 이순신 장군의 전승 기념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역사 유적지이다. 한산도는 삼도수군(三道水軍)의 본영(本營)이며, 이충무공이 9,000명의 왜병을 수장(水葬)시킨 한산대첩의 교전장으로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제113호)이 있으며 이곳에 제승당을 비롯하여 이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忠武祠)와 한산대첩 기념비·대척 문·충무문·행적비 등이 있다.(출처 : 다음 백과사전을 중심으로 재편집)
경치가 정말 좋습니다..
박경리 기념관..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출정하는 적들의 동태를 살피는 미륵산 봉수대..
당포해전이 있었던 곳..
【당포해전】
1592년(선조 25) 5월 29일 조선수군은 사천(泗川) 선창에서 적선 13척을 모조리 불태워버린 다음, 6월 1일에 고성의 사량도(蛇梁島:통영시 사량면 양지리) 앞바다로 옮겨가서 휴식을 취하며 일본군의 정세를 수색하였다. 이튿날인 2일 아침 일본 수군이 당포 선창에서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곧 출동하였으며, 당시 왜군은 21척의 배를 두 선창에 나누어 정박하고 일부는 성안으로 들어가 분탕질을 하고 있었다. 돌격장 이기남(李奇男)이 지휘하는 거북선을 돌진시켜 일본군의 층루가 있는 배를 쳐부수었고, 중위 장인 순천부사 권준(權俊)은 적함선 안으로 뚫고 들어가 적장을 쏘아 맞혔다. 이어서 척후장의 군관이자 흥양보인 진무성(陣武晟)이 그 적장의 머리를 베어내자, 일본군은 사기를 잃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군은 추격을 하여 적의 병선 21척을 모조리 불태웠다.(출처 : 다음 백과사전을 중심으로 재편집)
도솔암으로 내려 갑니다..
도솔암은 고려 때 도솔선사가 창건한 용화사 부속건물로 아담한 절로 절마당을 가로질러 가면 한산도 앞바다와 통영시내가 그림같이 조망이 되는 곳이다. 잠시 도솔암을 구경하고 '21.12.28일 도솔암 방문 시 인연을 맺었던 주지스님과 약 30분 다담[茶談]을 나눌 수 있었다. 스님은 국내의 유명 명소는 물론 해외의 40여 개 국가도 다녀오신 분이며 학교에서 강의도 하신 박학다식한 분이다.
'21.12.28일 도솔암 방문 시 나누었던 다담[茶談]
나이가 들어가면 좋은 공기와 좋은 물을 마시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최고라고 한다. ‘독사가 물을 마시면 독을 이루고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을 이룬다’라고 하시며, 마음을 곱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자식이 결혼 상대자를 데려오면 해 주어야 할 말로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는 스승이 있는가. 마음에 새길 책 한 권을 있느냐, 그리고 멘토가 있느냐를 물으라고 하였다. 사랑하지 않으면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기에 서로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은 우문이라고 하였다. 마음을 비우고 베풀면서 살기를 권하며, 한 달 이상 무위도식을 해도 받아줄 수 있는 지인이 있는가를 묻기도 하였다.
【도솔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인 용화사(龍華寺)의 부속암자이다. 943년(태조 20) 도솔(兜率)이 창건하였으며, 창건에 얽힌 설화가 매우 유명하다. 17세에 출가하여 25세까지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서 수도하였던 도솔은 이곳 미륵산으로 옮겨와서 암굴에 머무르면서 수도하였다. 그는 호랑이와 가까이 지냈는데, 어느 날 호랑이가 한 처녀를 업어 와서 바쳤다. 처녀는 전라도 보성에 사는 배이방(裵吏房)의 딸이었는데, 혼인날을 받아놓고 목욕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왔다는 것이다. 도솔이 처녀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자 배이방은 도솔에게 은혜를 갚기 위하여 300냥을 주었는데 그 돈으로 도솔암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도솔암 위쪽에는 도솔이 수도하였던 천연암굴이 있다. 창건 이후 초음(初音)과 자엄(慈嚴) 등의 고승들이 수도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여, 한때는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근대 한국불교 선종(禪宗)의 고승인 효봉(曉峰)이 한국전쟁 직후 제자인 구산(九山)과 함께 이곳으로 와 선종의 법맥을 계승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보문전(普門殿)과 칠성전(七星殿)·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절 전체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도솔암에서 본 통영 앞바다..
다담을 나눈 방..
주지 스님과 인증도 하고..
좌측이 밀치입니다..
숙소 앞바다에 노을이 지고 있네요..
밀치와 생굴..
다음은 사량도 지리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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