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동우회 등산팀 수요 산행은 한양 도성 2구간 낙산구간(혜화문 ~ 흥인지문)을 걸었다. 길을 걷는 동안 주변의 역사적인 시설들인 삼군부 총무당(총리기무아문), 비우당(이수광이 살던 초가집), 자주동천(단종비가 샘물을 길러 자주색 물을 들인 곳)을 들러보았다. 이 구간에는 이 외에도 동망정(단종비가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은 곳), 이화정(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사저), 이화벽화 마을 등이 있지만 이번에는 생략하였다. 걷기를 마치고 장충동으로 이동하여 족발에 막걸리 한잔으로 즐거운 시간을 가진 후 태극당에 들러 커피 & 빵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다음 주는 국방동우회 수요산행은 안보견학 부여 부소산성으로 대체합니다..
가을 냄새가 물씬 나는 흥인지문..
혜화문은 부암동 창의문에서 백악산을 너머 성북동을 지나 창경궁로 북쪽에 이르는
서울한양도성 백악구간의 끝이자 시작하는 지점으로 이곳에서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혜화문】
혜화문(惠化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 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동쪽의 소문이다. 숙정문을 대신하여 한양의 북쪽 관문 역할을 하였다. 동소문(東小門)이라는 속칭이 있는데, 이는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다. 혜화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본래 홍화문(弘化門)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발음이 같다 하여 혜화문으로 이름을 고쳤다. 일반적으로 홍예 안쪽 천장에는 용이 그려져 있어야 하나, 혜화문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문 주변에 새가 많아 용 대신 새들의 왕인 봉황을 이용하여 새들을 쫓고 악한 기운을 막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출처 : 위키백과에서 발췌)
삼선동 369 성곽마을..
성곽은 시대에 따라 수시로 보수되어 모양이 다릅니다..
태조, 세종, 숙종, 순조 때의 축성시기에 따라 성곽 모양의 형태가 다릅니다..
나팔꽃이 곱게 피어 있고..
성곽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오는 장수마을..
장수마을은 나이 든 사람들이 많이 사는 낙산 동쪽 비탈 지역의 이름이다. 오래전 뉴타운 건설이 계획되기도 했으나 주민 투표를 통해 그 결정을 뒤집고 도시 재생 절차를 밟아 아름답고 단출한 마을로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삼군부 총무당..
【삼군부 총무당】
삼군부 총무당(三軍府總武堂)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 한성대학교 인근에 있는, 조선 말기의 군사기관이었던 삼군부(三軍府)의 중심 건물이다. 1978년 12월 18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삼군부의 임무는 군무를 통솔하고 숙위 문제를 총괄하는 동시에 변방에 관한 일체의 사항까지도 관장하는 것이었다. 삼군부가 완전한 조직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67년이었다. 삼군부는 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금위영·용호영 등 5개 군문을 비롯하여 전국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병인양요ㆍ신미양요 때에 위세를 떨쳤다가, 개항 이후인 고종 17년(1880년)에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총무당은 청헌당(淸憲堂)·덕의당(德義堂)과 함께 원래 삼군부 내에 있었던 건물로서, 그곳에 남아 있다가 1930년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덕의당은 언젠가 없어졌고, 청헌당은 1967년 정부종합청사가 건립될 때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경내로 옮겨졌다. 총무당 건물은 고종 5년(1868년) 삼군부의 무략(武略)을 총괄하는 청사로 지어졌다. (출처 : 위키백과에서 발췌)
총무당 뒤쪽의 멋진 소나무..
낙성 순성길은 서울의 동쪽으로 좌청룡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감나무에 감들도 영글어 갑니다..
성곽은 시대에 따라 수시로 보수되어 모양이 다 다릅니다..
도성길을 잠시 벗어 나 비우당도 잠시 들러 갑니다..
조선시대 대표 실학자인 이수광의 거처였던 비우당..
【비우당(庇雨堂)】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재된 풍물시장 바로 옆에는 우산각(雨傘閣)이라는 초가로 된 정자가 있다. 조선 세종 때 대사헌에 오른 하정(夏亭) 유관은 매우 검소하고 청렴해 비가 오면 자신이 사는 오두막집에서 물이 새 우산을 받치고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유관의 집을 우산각, 신설동과 보문동 사이의 유관이 살던 마을을 우산각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관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수광의 외가 6대 조상으로 비우당을 상속했지만 임진왜란 때 집이 불에 타버렸다. 이수광은 이곳에 비우당(庇雨堂)이라는 지푸라기 지붕의 작은 초가집을 지어 유관의 청렴성을 알렸다. 이런 연유에서 청계천에는 비우당교라는 다리가 있고 신설동로터리에서 신답초등학교에 이르는 도로에는 하정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출처 : 서울신문을 중심으로 재편집/20. 9. 6)
비우당 담벼락에 있는 자주동샘(단종비가 샘물을 길러 자주색 물을 들인 곳)
【자주동샘】
조선 초 단종비 송씨(정순왕후)는 영월로 귀양 간 단종을 애절하게 기다리며 세 시녀와 함께 숭인동 17번지(청룡사 옆) 정업원(淨業院)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명주를 짜서 댕기, 저고리 깃, 옷고름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정업원에서 서쪽으로 300여 미터 떨어진 화강암 바위 밑에 샘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이 물에 명주를 담갔더니 자주색 물이 들었다 한다.
자주동샘으로 인해 그 일대는 자지동천, 자줏골, 자주동과 같이 자주색과 관련된 명칭이 많으며, 자주동샘 인근에는 청룡사, 동망봉 등 단종애사에 얽힌 명소가 산재해 있다. 자주동샘 바로 옆에는 자줏물이 든 명주를 널어 말리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자지(紫芝)란 자줏빛을 띄는 풀이름을 말한다.
비우당과 자주동샘을 둘러본 후 다시 낙산공원으로 올라와 성곽을 따라 흥인지문으로 갑니다.
이화마을을 잠시 둘러봅니다 / 508 구멍가게로 KBS에서 방영을 했다고 하네요..
이화 벽화마을(梨花 壁畵마을)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에 위치한 벽화마을로 대학로 동쪽, 낙산공원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이화동은 주택이 노후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으나 2006년 노후 방치된 지역의 정주 여건 개선의 일환으로 ’ 06년 9월 ~ 12월까지 이화마을에 벽화와 조형물이 세워져 이화 벽화마을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이화 벽화마을은 TV 프로그램이나 각종 드라마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관광객들의 명소가 되었다.
성곽 내부로 진행을 합니다..
창신동으로 좌측에 채석장이 보이는데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이곳의 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멋진 소나무도 있고..
오늘 트레킹의 날머리인 흥인지문이 보입니다..
【흥인지문】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 대한민국 보물 제1호이며, 속칭 '동대문'이라 부른다. 본래 ‘흥인문’이었으나 풍수지리상 한양의 동쪽이 비어있다 하여 ‘지’ 자를 넣어 무게감을 실어 주었다고 한다. 1996년 일제강점기 문화재 재평가작업을 통해 ‘흥인지문’이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초부터 창건하기 시작해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다. 지대가 낮아 땅을 돋운 후 건설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보다도 오래 걸렸다고 한다. 축조 당시 성문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흥인(興仁)’이란 어진 마음을 북 돋운다는 뜻으로, 유교사상의 덕목인 ‘인(仁)’을 의미한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흥인문이 크게 손상되어 정비할 때에, 풍수지리상 한양의 동쪽이 비어있다고 하여 ‘지(之)’자를 넣어 무게감을 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등 현판이 세 글자인 다른 도성의 사대문과 달리 네 글자 현판을 달게 되었다.
완성된 지 50여 년이 지난 1451년(문종 1)과 1453년(단종 1)에 일부 보수작업이 진행되었고,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1868년(고종 5)에 1년 동안 전면적인 개수 공사를 진행해 1869(고종 6)에 완공되었다. 한편, 일본이 1934년에 본래의 이름인 흥인지문이 아닌, 동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하면서 동대문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흥인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출처 : 다음 백과)
흥인지문을 배경으로 단체인증..
흥인지문공원은 가을 정취가 물씬 풍깁니다..
흥인지문에 있는 각자성석(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으로 한양도성에는 약 280여 개가 있다..
장충단 족발집으로 이동을 합니다..
뒤에서 본 흥인지문..
동대문 신발가게들이 있는 골목..
전태일이 분신을 했던 평화시장..
전태일은 대구 태생으로 초등학교를 4학년에 중퇴하고, 17세 때부터 평화시장의 의류 제조 회사에서 재단사로 일했다. 동료 재단사들과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만들어 평화시장의 노동 조건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토대로 노동청과 서울특별시에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묵살당했다. 1970. 11, 13일 22세의 젊은 나이에 노동자의 근로 조건 개선을 요구하고,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한 후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청계천..
동대문 디자인 풀라자.,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는 2004년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받은 이라크 출신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를 맡았다.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물이 흐르듯 유려한 구조가 특징이다. 동대문 역사문화공원과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에도 고스란하다. 그녀가 잡은 테마는 ‘환유의 풍경(The Metonymic Landscape)’이다.
서울 시티 투어 버스가 정차해 있네요..
경동교회..
【경동교회】
경동교회는 1945년 김재준(金在俊) 목사가 설립한 한국 개신교 교파 중 가장 진보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대표적 교회로,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한국교회의 청년운동과 토착화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등을 주도하고 있다. 1945년 해방 이후 조선신학교 교장 김재준이 미군정청과 교섭하여 인수한 일본 천리교(天理敎) 건물(장충동 1가 26-1)에서 선린형제단 단원과 이북 출신 학생·청년 30여 명이 첫 예배를 드린 것이 경동교회의 시작이다. 1958년 예배당이 완공되었으며 김재준 목사가 은퇴하고 강원용이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일부 발췌)
평안도 족발집에서 족발(대 60,000원)과 막걸리, 그리고 막국수(1인 8,000원)로 즐거운 시간을 가집니다..
태극당에서 빵과 커피로 마무리합니다..
【태극당(太極堂) 】
태극당은 1946년에 개점한 장충동에 위치한 빵집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으로 불린다. 1946년에 명동에서 개업하였다가 1973년에, 현재의 장충동으로 이전하였다. 여러 개의 분점이 있었으나. 현재 장충동 본점만 남아 있다. 1947년에 출시된 ‘모나카 아이스크림’, 사과잼이 들어가는 롤케이크, 한 손 크기의 ‘고방카스텔라’가 태극당을 대표하는 제품이다. 2020년에는 30년 이상 영업한 장수 업체 중 선정하는 ‘백년가게’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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